사건과 사고

터스키기 매독 실험, 미국 최악의 비윤리적 생체 실험

제이스톤 2024. 2. 16. 23:03

 1997년 5월 16일, 미국 빌 클린턴 대통령은 1932~1973년까지 터스키기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공식적으로 사과하였습니다. 클린턴은 피해자와 그 가족들을 백악관으로 초청한 자리에서 사과와 함께 터스키기 대학에 ‘생명윤리연구 및 건강관리를 위한 국립 센터’를 설립하기 위한 투자를 발표하였습니다. 과연 터스키기에서는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요?

 

터스키기 흑인 매독 실험의 전말

 터스키기 매독 실험(Tuskegee syphilis experiment)은 1932년에서 1973년 사이 미국 공중보건국(USPHS)이 매독을 치료하지 않고 내버려두면 어떻게 되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미국 남부 알라배마 주의 터스키기 지역의 흑인들을 대상으로 시행한 비윤리적인 생체실험입니다.

 공중보건국과 터스키기연구소의 공조 아래 약 40여년간 흑인 600명을 대상으로 실험이 진행되었습니다. 이들 중 399명은 실험 시작 이전에 매독에 감염된 바가 있었으며, 201명은 감염이력이 없는 대조군이었습니다.

터스키기 매독 실험, 피실험자에게서 채혈을 하고 있다.
터스키기 매독 실험, 피실험자에게서 채혈을 하고 있다

 의료진은 흑인들에게 지역의 용어로 매독, 빈혈, 피로증 등을 합쳐서 일컫는 '나쁜피(Bad Blood)'를 치료한다고 속여 동의서를 받았습니다. 피실험자들에게는 무료로 의료, 식사가 제공되었으며 사망시에는 장례비용까지 제공되었습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매독에 감염되고 방치된 피해자들은 정부의 무료 건강관리를 받는 것이라고 알고 있었습니다.

 1943년에는 매독 치료에 효과적인 페니실린이 개발되었음에도 매독에 감염된 399명에게 적절한 치료를 해주지 않았습니다. 결국, 1972년 미 AP통신의 보도로 사건인 공개될 때까지 7명이 매독으로 사망하고, 154명이 합병증으로 숨졌습니다.

 

 

비윤리적인 실험과 제보자

 이 비윤리적인 실험의 과정과 결과는 1936년부터 1973년까지 정기적으로 의학저널에 보고되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한 사람을 제외하고 아무도 그 윤리성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습니다. 1966년, 공중보건국에서 성병조사 업무를 담당하던 피터 벅스턴(Peter Buxtun)은 이 실험에 문제를 제기하였습니다.

 하지만 내부에서 묵살되자 1972년 직장을 그만두고 신문기자인 친구에게 제보를 하여 이 실험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사회적 이슈가 되면서 1973년에서야 이 실험은 중단되었습니다.

 1973년 열린 미 상원 청문회에서 실험에 관여한 의사들은 자신들의 잘못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였습니다. 가난해서 치료를 받지 못하고 죽을 사람들인데 의학발전에 기여하고 죽는 것은 잘못이 아니라는 발언이 큰 공분을 샀습니다.

 

실험을 주도한 존 커틀러

 터스키기 매독 실험을 주도한 인물은 미국 공중보건국의 존 커틀러(John C. Cutler) 박사였습니다. 1942년 의대를 졸업하고 공중보건국에 들어간 커틀러 박사는 각종 생체 실험의 대가로 승진을 거듭했습니다. 1967년 피츠버그 대학 교수로 자리를 옮기 이후에도 생체 실험을 계속 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아이러니한 사실은 그가 바로 페니실린을 매독 치료제로 개량하는데 성공한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존 커틀러, 터스키기 매독 실험을 포함하여 비윤리적인 의학 연구에 그가 관여한 사실이 밝혀져 여러 논란의 여지가 있다.
존 커틀러, 터스키기 매독 실험을 포함하여 비윤리적인 의학 연구에 그가 관여한 사실이 밝혀져 여러 논란의 여지가 있다.

 

음모론과 밝혀진 진실

 사건이 밝혀지기 몇 년 전 미국 정부가 이처럼 부끄러운 사실을 감추기 위해 치밀한 음모를 꾸몄다는 음모론이 나돌았습니다. 흑인들을 상대로 자행한 이 실험을 은폐하려고 필사의 노력을 해왔다는 것입니다.

 존경받는 연구기관이 흑인들을 죽게 내버려두고 또 그들의 아내와 자녀들에게 병을 옮기도록 방치했다는 것은 너무나 터무니없는 주장이었습니다. 권위 있는 기관이 그런 짓을 하고서 그것을 감추려고 했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이야기였습니다.

터스키기 매독실험, 매독치료를 하지 않은 자연상태의 영향을 실험
터스키기 매독실험,  매독치료를 하지 않은 자연상태의 영향을 실험

 그러나 밝혀진 이 실험의 민낯은 충격적이었습니다. 매독균 검출을 위해 마취도 없이 척수액을 뽑는 검사를 하기도 했으며, 아스피린과 철분제를 치료제라고 속여 나눠주었습니다. 게다가 해당 지역 의사들과 보건소에 공문을 보내 실험에 참여한 흑인들이 병원에 올 경우 치료하지 않고 그냥 돌려보내라고 요구하였습니다.

 1941년 2차 세계대전으로 터스키기 지역 청년들이 육군에 징집 대상이 되었을 때, 피실험자들이 징병되어 군의 의료서비스를 받을 것을 우려하여 지역징병위원회와 접촉해 징병을 막아서기도 하였습니다. 터스키기에서 징집된 사람 중 256명이 매독에 걸린 것이 발견되었고, 국가에서는 이들을 치료하지 말라고 요청하기도 하였습니다. 미 육군도 이 요청을 받아들였다고 합니다.

 실험 생존자와 유족들은 정부에 소송을 걸어 총 900만달러의 보상을 받게 되었으며 1997년 빌 클린턴 대통령이 공식 사과하게 된 것입니다. 이 실험은 인체를 대상으로 하는 연구에 대한 윤리의식을 높이는데 기여한 부분도 있습니다. 그러나 미국 흑인을 비롯한 소수자가 보건당국이나 백인 집단의 연구, 의학적 처치, 백신접종 등을 극단적으로 불신하는 배경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또 다른 사건이 공개되다

 그렇게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던 사건은 수전 레버비(Susan Reverby) 교수에 의해 다시 떠올랐습니다. 메사추세츠 주 소재 웰즐리 칼리지의 수전 레버비 교수는 의학사에 관한 책을 쓰기 위해 존 커틀러가 남긴 자료를 살펴보게 되었습니다.

 그 자료 속에는 터스키기 외에 또 다른 곳에서 매독 실험이 존재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었습니다. 존 커틀러 박사는 터스키기의 실험만으로는 부족하다고 판단하고 과테말라로 눈을 돌렸습니다. 당시 독재 정권의 오랜 집권으로 치안이 열악하고 미국 자본에 경제가 종속된 상태였던 과테말라의 상황을 악용하여 교도소에서 실험을 진행시켰습니다.

터스키기 매독 실험 대상자들
터스키기 매독 실험 대상자들

 실험은 1946~1948년까지 페니실린의 효용성을 검증하기 위해 실시되었습니다. 먼저 실험에 필요한 매독환자를 만드는 작업이 진행되었습니다. 실험 대상은 과테말라 교도소에 수감된 남성과 정신병원에 수용된 남녀환자 1,600여명이었습니다. 적어도 1명은 실험 과정에서 사망한 것으로 확인되었으며, 사건 발생 60년이 지난 후 실태 조사 결과이므로 실제 피해자는 훨씬 많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696명에게 매독균, 772명에게 임질균, 142명에게 초기 매독균을 주사하거나 성병에 감염된 매춘부를 교도소 수감자들과 접촉시키는 방법으로 고의로 성병을 전염시켰습니다. 성병에 걸리지 않은 매춘부의 자궁경부에 감염물질을 주입시킨 뒤 실험대상자에게 접근시키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방법의 성병 감염률이 떨어지자, 나중에는 실험 대상 남성들의 몸에 직접 주사하거나 상처 부위에 성병 박테리아를 접촉시키는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사건 보도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오바마는 직통전화로 과테말라에 사과를 전했고,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과 캐슬린 시벨리루스 보건장관은 공동 사과성명을 발표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