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문명.유물.유적

요르단의 고대도시, 페트라(Petra)

제이스톤 2018. 4. 27. 15:23

요르단의 고대도시, 페트라(Petra)

 요르단의 수도 암만에서 남쪽으로 150km가량 떨어진 곳에 있는 페트라(Petra)는 성서에는 ‘셀라’로 기록되어 있다. 이는 히브리어로 ‘바위’란 뜻이다. 해발 950m에 위치하고 있는데 바위산으로 둘러싸여 있다. 암반에는 붉은색이 주를 이루는 여러가지 색깔의 다양한 무늬가 있어 신비롭다.

 페트라는 나바트족(나바테아인)에 의해 세워졌다. 나바트 왕국의 수도로 기원전 7세기부터 수백년에 걸쳐 바위산 협곡을 따라 암벽을 깎아 조성되었고 극장과 목욕탕, 상수도 시설까지 갖추고 있었다. 이곳에는 물이 있어 농사를 지을 수 있었다. 비단과 향료의 이동로라 부르는 대상로를 지배하여 번영을 누렸다.

(시크 Siq - 출처 : Pixabay)

 페트라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깎아지른 듯한 커다란 사암 바위벽이 있는데 이를 시크(Siq)라 부른다. 너비 5m 정도의 좁은 길을 따라 안으로 들어가는데 좌우가 온통 깎아지른 듯한 수직의 바위벽이어서 시크 안에서는 하늘을 볼 수 없다. 말 2필이 겨우 비켜 지날 수 있는 시크는 페트라로 들어가는 유일한 통로이자 페트라를 지켜주는 방어벽이기도 했다.

 페트라는 물을 외부에서 끌어다 써야 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나바트인들은 시크의 바위벽 속에 수로를 만들어 놓았다. 이 수로는 허리춤 정도의 높이에 길게 홈이 파여 있다. 비가 오면 시크는 배수로의 역할까지 하는데 호우가 쏟아지면 수용능력을 잃기도 한다. 1963년 대홍수 때는 많은 관광객이 행방불명되는 불상사가 발생하기도 했다.

(알 카즈네 - 출처 : New7wonders.com)

 시크를 통과하면 페트라 최고의 걸작 알 카즈네(Al Khazneh)가 나타난다. 카즈네는 바위벽을 깎아 만든 건물의 정면이다. 카즈네는 그리스 로마 미술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대상들의 활동 덕분에 외부 세계와 접촉하기 쉬웠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이 벽면은 2층으로 나뉘어 있고 각 층에는 코린트 양식의 기둥이 각각 6개씩 세워져 있다. 전체 높이는 43m, 폭은 30m에 이른다. 카즈네는 나바트 왕의 무덤이나 장제전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내부는 바위 속을 파내어 만든 사각의 암굴 공간으로 벽면에는 장식이나 비문이 남아 있지 않다.

 카즈네를 처음 알린 이는 스위스의 탐험가 루이스 부르크하르트였다. 그는 1812년 8월, 시리아에서 이집트로 가던 중 페트라의 호르 산에 아론의 묘가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호기심에 계곡 아래의 작은 마을 와디 무사로 들어갔다. 그의 여행기가 이듬해에 발표되지만 큰 관심을 끌지는 못했다. 1929년에 이르러서야 발굴 작업이 시작되었고 그 결과 기원전 7000년경 문명이 존재했음이 드러나게 되었다.

(알 데이르 - 출처 : Pixabay)

 카즈네에서 나와 반대편인 페트라 시가지 쪽으로 난 길을 따라가면 4개의 암굴 분묘가 있다. 이어서 옛 페트라 시의 중심지였던 넓은 공간이 펼쳐지는데 옛날 나바트인들도 시장으로 사용했던 흔적이 남아 있고 지금도 상인들이 관광객에게 기념품을 파는 시장으로 사용하고 있다.

 나바트 왕국은 200년 가까운 세월을 로마와 겨루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영토를 침공하기도 했다. 한때 시리아까지 지배하며 번성했던 나바트 왕국이었지만 로마 앞에서 무릎을 꿇고 말았다. 로마군은 페트라로 들어가는 수로를 외부에서 막아 버렸고 바위산에 갇힌 나바트인들은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서기 106년 로마의 트라야누스 황제 때의 일이었다. 페트라는 그 후 로마와 비잔틴 시대에 겨우 명맥을 유지해오다가 8세기 때 일어난 대지진으로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참고자료 : 세계 신 7대 불가사의(2007년, 권삼윤 저, 학고재, p94-1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