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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 최후 항전지, 마사다 요새 유적

제이스톤 2018. 2. 21. 15:00

유대인 최후 항전지, 마사다 요새 유적

 마사다는 히브리어도 "요새"라는 뜻이며 사해의 서쪽 약 4km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주위의 유대 광야의 산들과는 고립된 높이 434m의 이 천혜의 절벽 바위 요새는 정상이 길이 620m, 가장 넓은 곳의 폭이 250m, 평균 120m인 평지를 이루고 있다. 마사다의 터전은 융기된 대지이며, 그 평평한 꼭대기는 약 80m 대부분은 아직도 흙이 표면을 이루고 있다. 꼭대기로 올라가는 길은 동쪽에 난 '뱀길'과 서쪽의 다소 순탄한 길이 있는데, 서쪽 길에는 망대가 길목을 지키고 있다.

 이 바위산을 처음 요새로 만든 이는 대제사장 요나단(Jonathan)이었다. 그 후 유대왕 헤롯(Herodes)이 여기에 왕궁을 짓고 성벽을 둘러 난공불락의 요새로 만들었다. 그 무렵 이집트의 여왕 클레오파트라라는 로마 집정관 안토니우스에게 유대 왕국을 그녀에게 달라고 졸라대고 있었다. 로마에 기대고 있던 헤롯은 유대인의 반란과 로마의 배신을 두려워하여 마사다를 유사시의 피난처로 만들었던 것이다.

 서기 1세기의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Josephus)는 그의 저서 "유대 전쟁사(The Jewish War)"를 통해 마사다에 대한 상세한 기록을 남겼다. 그는 서기 66년 유대인들이 로마제국의 통치로부터 벗어나려 반란을 일으켰을 때 갈릴리 지방의 유대군 지휘관이었으나 나중에 로마군에 넘어간 사람이었다. 그는 비록 조국에 등을 돌렸지만 그 어디에도 남아있지 않은 마사다 전투를 기록으로 남겼다.

 헤롯이 죽은 뒤 서기 66년 유대전쟁이 일어나고 이 전쟁이 로마의 월등한 군사력으로 서기 70년, 예루살렘의 함락과 더불어 성전의 파괴를 끝을 맺게 되었다. 이에 굴복하지 않은 960여명의 "열심당(젤롯파)"이라 불리는 극우파 민족주의자들은 이미 66년에 당시 소수의 로마 군인들이 지키고 있던 마사다를 점령하여 로마에 대항하였다. 마사다에 저장된 엄청난 양의 식량과 물, 무기는 그들의 버팀목이 되었다.

 로마황제는 이들을 쳐부수도록 엄명을 내렸다. 마사다를 포위한 로마군은 성의 사방 8곳에 주둔지를 정하고 캠프를 세웠다. 성은 외부로부터 완전히 고립되었다. 그러나 사막과 다름없는 들판을 건너와 지친 로마군은 가파른 벼랑 위에서 내려다 보며 활을 쏘아대는 반란군을 이길 수가 없었다.

 로마의 플라비우스 실바(Silya) 장군은 군수품의 보급이 어려운 로마군에게 불리한 전쟁이라 판단하고 무더운 여름이 오기 전에 전쟁을 끝내기로 마음먹었다. 마사다의 서쪽 벼랑에는 희고 넓은 바위가 툭 튀어 나와 있었다. 실바는 이 곳에 흙과 돌을 다져 인공 능선을 쌓아 올리도록 지시했다. 비탈길이 완성되자 로마군은 공성탑을 만들어 올렸다. 철판을 두른 이 탑에서 로마군들이 활을 쏘며 엄호하는 사이 다른 병사들이 투석기를 끌어 올렸다. 투석기에서 날아간 20kg이 넘는 돌들은 마사다의 성벽을 무너뜨리고 말았다. 유대인들은 서둘러 무너진 성벽에 나무대들보를 두겹으로 쌓고 그 안에 흙을 넣은 새로운 벽을 쌓았다. 그러자 실바는 미사일 공격을 감행했다. 불화살이 날아가 박히자 나무벽은 순식간에 불길에 휩싸이고 말았다.

 실바는 기쁨에 넘쳐 그들의 진지로 물러났다. 그는 다음날 아침 구름다리를 놓고 성안으로 쳐 들어 가기로 결심했다. 로마군은 밤새 아무도 도망치지 못하도록 마사다를 지켰다. 그날 밤 유대인들의 지도자 엘리에제르 벤 야이르(Eliezer ben Yair)는 남자들을 모두 한 군데 불러 모았다. 그는 "자유란 이름으로 수의를 입자"며 자결을 유도하는 연설을 하였다. 먼저 남자들이 가족들을 죽이고 10명 중에서 한명을 뽑아 그가 나머지를 죽이고 마지막 한 사람이 자결을 하여 서기 73년 4월 15일 마사다에서 저항하던 960명이 모두 숨졌다.

 다음 날 아침 로마군이 단단히 무장을 하고 성벽에 나무다리를 걸쳐 놓았다. 그러나 적은 보이지 성은 고요함 속에 모든 것이 불타 있었다. 로마군은 뜻밖의 상황에 당황하였다. 비록 적군이지만 그 결단과 용기 앞에 자신들의 승리를 기뻐할 수는 없었다. 로마 병사들은 숨어있던 2명의 여자와 5명의 아이들을 발견했다. 그들에게서 간밤의 일을 전해 듣게 되었고 실바는 그들을 살려 주었다.

     

 요세푸스가 쓴 이 마사다 전투는 다른 역사 기록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것이어서 아무도 믿으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1838년 사해 바닷가를 여행하던 두 미국인 학자 로빈슨과 스미스가 이 정엄한 바위산의 폐허 흔적을 망원경으로 살펴 본 이후 많은 탐험가들에 의해 마사다의 진실은 조금씩 밝혀지기 시작했다.

 이에 1963년 이스라엘 정부가 유대인 고고학자 이가엘 야딘에게 유적의 발굴을 맡겼다. 1917년 예루살렘에서 태어난 야딘은 이스라엘 독립운동에 참여해 군 참모장이 되었다가 나중에 부총리까지 오른 사람이다. 1952년 군을 떠난 야딘은 히브리대학 고고학 교수로 일하면서 1955년부터 사해 근처에서 여러 유적을 발굴해 왔다.

 야딘은 1963년 10월에서 1964년 5월, 1964년 11월에서 1965년 4월 두 차례에 걸쳐 마사다를 발굴했다. 그리고 요세푸스의 기록이 거의 사실임을 밝혀 냈다. 힘든 작업에도 불구하고 자원봉사자들이 몰려들었다. 가드나(Gadna, 이스라엘 청소년 전투부대)와 키부츠(집단 농장)에서 온 지원자까지 합쳐 날마다 평균 300명이 발굴을 도왔다. 시속 100km의 남풍과 쏟아지는 장대비는 발굴 작업을 더 힘들게 하였다.

 야딘이 제일 먼저 발굴한 곳은 마사다 북쪽 끄트머리 벼랑에 지어진 3층 건물이었다. 요새라기보다 화려한 벽화로 장식된 왕궁이었다. 야딘은 여기에서 처음으로 유골 세 구를 찾아 냈다. 하나는 젊은이의 것이었는데 그 옆에는 갑옷에 달았던 은비늘 수백 개와 화살들이 흩어져 있었다. 또 하나는 금방 손질한 듯이 땋은 까만 머리카락의 젊은 여자 유골, 나머지는 어린아이의 것이었다.

 이 왕궁 옆에 커다란 창고가 있었는데 이 건물을 되살리기 위해 트랙터와 기중기를 사용해야만 했다. 창고에는 기름, 술, 밀가루 단지들의 파편이 가득 쌓여 있었다. 또  식량이나 일거리를 나눌 때 쓰였던 토큰들도 있었다. 창고 뒤에는 아파트와 비잔틴 수도사들이 지은 회당이 있고, 헤롯의 별장인 서궁과 커다란 수영장도 있었다. 왕은 마사다를 빙 둘러 흰 돌로 성벽을 쌓고 군데군데 탑 38개를 세웠다. 탑안과 성벽에 붙여 지은 방은 모두 110개로 유대인들은 이 방을 칸막이로 막아 여러 세대가 함께 살았다. 특이한 것은 미크베(Mikye)라 불리는 유대교의 침례의식 목욕탕이 발견된 것이었다.

 어느 날 가장 뜻깊은 유물이 나왔다. 성벽의 한 방에서 파편더미를 치우다가 두루마리 구약성서가 나왔다. 마사다에서 나온 두루마리 구약성서는 모두 14개였다. 시편, 레위기, 에스겔서, 시명기 부분들과 유대 민족이 해방된 기쁨을 적은 희년서, 그리고 외경(구약 성경에 들어있지 않은 책 14권)인 '벤 시라의 지혜서' 등이 발굴되었다. '벤 시라의 지혜서'는 탈무드에 널리 인용되어 율법학자에게 성서와 마찬가지로 권위있게 취급된다. 원본이 자취를 감추고 희랍어 번역이 외경에 수록되었는데 마사다에서 히브리어 원본이 나온 것이다.

 1963년에서 65년의 이 발굴에서 마사다의 건축물 거의 전부가 드러났고 이에 따른 부분적인 복원 작업도 실시되었다. 헤롯 시대(B.C. 37-4년), 반란기(A.D. 66-73년), 비잔틴 시대(A.D. 5-6세기)에 관한 것들을 발굴해 냈으며 헤롯 시대 이전의 유적은 발굴되지 않았다.

 고고학계에서는 마사다가 정치와 고고학이 결탁해 역사적 사실을 미화하는데 이용됐다는 주장이 긍정적인 반응을 얻고 있다. 발굴 결과 요세푸스의 기록과 일치하지 않는 부분이 있는데 유골은 겨우 20구밖에 나오지 않았으며 제비뽑기에 쓰인 질그릇 조각은 10개가 아닌 11개가 발견되었다. 그래서 요세푸스가 영웅적 항전을 미화하기 위해 극적인 최후를 가미해 집단 자살로 꾸며냈다고 이스라엘 고고학자 닐 실버먼은 말한다. 또 60년대에 이스라엘은 적으로 둘러 싸여 있었으므로 국민들에게 용기와 결사항전의 본보기로 삼을 무언가가 필요했고 요세푸스의 허구를 정치가들이 이용한 것이라고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