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비한 건축물

[증기시대 7대 불가사의] 뉴욕을 하나로 만든 최초의 현수교, 브루클린 다리

제이스톤 2018. 9. 11. 12:00

[증기시대 7대 불가사의] 뉴욕을 하나로 만든 최초의 현수교, 브루클린 다리(The Brooklyn Bridge)

 19세기에 뉴욕의 떠오르는 지역이었던 브루클린(Brooklyn)과 맨해튼(Manhattan)은 이스트 강(East River)으로 나뉘어져 있었습니다. 다리를 놓는 것이 해답이었지만 이전까지 볼 수 없었던 공학적 기술이 필요했습니다. 결국 다리는 세워졌지만 수석 설계자의 죽음과 그 아들이었던 수석 엔지니어의 고통스런 삶을 대가로 치뤄야 했습니다.

 1852년 겨울, 엔지니어인 존 로블링(John Roebling)은 브루클린과 맨해튼 섬 사이를 오가는 페리에 갇혔습니다. 보트 주변의 물이 단단하게 얼어붙었고 로블링과 그의 15살 난 아들 워싱톤은 보트 안에서 몇시간 동안 얼음 사이로 길이 열리기를 기다렸습니다. 그 속에서 유명한 도시공학가인 로블링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두 번화한 도시 사이를 잇는 다리의 건설 가능성을 곰곰히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강이라기 보다는 바다의 팔에 가까운 이스트 강에 그러한 구조를 세우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브루클린 다리(Brooklyn Bridge) (출처 : Pixabay)

 로블링이 뉴 올랜도 토렌톤에 있는 그의 집으로 돌아왔을 때 그는 이스트 강의 다리를 심각하게 연구하고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습니다. 독일 이민자출신인 로블링은 이미 피츠버그, 신시내티, 니아이가라 폭포에서 건설한 다리로 유명하였습니다. 그는 경험상 브루클린의 다리가 현수교여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현수교는 다리 길이를 길게 하면서도 두 개의 지지대만 있으면 가능합니다. 그러나 당시 건설된 가장 긴 현수교는 1849년 웨스트 버지니아의 휠링(Wheeling)에서 완공된 것이었습니다. 탑 사이의 폭(경간)이 단지 1000피트였습니다. 이스트 강을 가로지르는 다리는 탑 사이의 폭이 1,600피트로 50% 이상 길어야 했습니다.

 이 때문에 로블링의 설계는 좀 더 스펙터클한 규모가 요구되었습니다. 고딕 양식의 돌로 지어진 탑은 약 300피트 높이가 되어야 했습니다. 교량 자체의 노반(하중을 지지하는 부분)은 85피트 폭이 될 것입니다. 맨해튼 탑을 지지하려면 강바닥 흙을 기반암까지 수중 78피트를 굴착해야 했습니다. 접근도로를 포함한 전체 교량은 1마일이 넘는 거대한 규모였습니다. 19세기 중반 이러한 건설은 놀라운 노력이 요구되었습니다.

 로블링의 명성에도 불구하고 비평가들은 그의 다리 계획에 회의적이었습니다. 서스펜션 다리는 새로운 디자인이었고 프랑스의 앙제(Angers)와 같은 많은 곳에서 붕괴 사고를 겪었습니다. 그러나 1866년에 얼어붙은 강이 페리 서비스를 중단시키면서 조치가 필요하다는 것이 분명해졌습니다. 이듬해 입법부에 의해 뉴욕 교량 회사(New York Bridge Company)가 설립되었습니다. 이 회사는 로블링을 프로젝트의 수석 엔지니어로 임명했습니다.

 불행히도 다리 건설의 계획 단계에서 존 로블링은 1869년 6월 28일 발생한 사고로 심한 부상을 당했습니다. 과속하던 페리가 부두에 부딪혔을 때, 브루클린 탑 위치를 조사하기 위해 선착장에 서 있던 로블링의 발이 으스러졌습니다. 그는 발가락 절단 수술에도 불구하고 파상풍이 시작되었고 약 한달 후인 7월 22일 사망하였습니다.

 다행히도 그의 아들 워싱턴은 그때까지 잘 교육받은 기술자였으며 이미 아버지의 다리 건설 프로젝트를 도와주고 있었고 그의 설계를 잘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이스트 강의 다리 건설에 대한 그의 지식은 충분했기 때문에 회사의 이사회는 1869년 8월 새로운 수석 기술자로 워싱턴을 지명했습니다.

브루클린 다리(출처 : Pixabay)

 다리를 세우는 첫번째 도전은 다리의 탑을 위한 기초를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탑이 강물 위에 위치해야 했기 때문에 케이슨(Caisson)이라는 장치가 강바닥을 기반암까지 굴착하는데 사용되었습니다. 케이슨은 탑의 기초보다 커다랗고 바닥이 열린 커다란 나무상자입니다. 그것을 강바닥으로 내리면서 물을 밖으로 퍼내기 위해 압축 공기가 주입되었습니다.

 그런 다음 작업자가 장치의 내·외부에 모두 문이 있는 폐쇄된 공간인 ‘에어록(Airlock)’을 통해 케이슨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작업자가 정상 압력에서 방에 들어가고 나서 외부 문이 닫히고 공기 압력이 케이슨 내부 압력과 동일해질 때까지 공기가 주입되면 내부문을 열 수 있습니다. 그런 다음 작업자는 케이싱 바닥까지 내려가서 비교적 건조한 상태에서 강바닥을 파냈습니다.

 브루클린 다리가 건설되었을 당시 고압 공기가 인체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는 별로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고압 상태에서 공기 중의 질소는 체내의 액체에 용해될 수 있습니다. 압력이 낮아지면 질소는 몸에서 빠져나와 위험한 장소에 거품을 형성할 수 있습니다.

 문제의 해결책은 케이슨을 떠나는 작업자에 대해 매우 천천히 감압하여 용해된 질소를 운반하여 폐로 방출시키는 것입니다. 불행히도 이러한 사실은 당시 과학자들에게는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종종 케이슨병(Caisson Disease) 또는 잠수병이라 불리는 이 상태는 작업자들을 매우 위험하게 만들었습니다. 작업자들은 에어록에서 나왔을 때 무작위로 이 질병에 휩쓸렸을 것으로 보입니다. 증상은 사람마다 달랐지만 관절의 부종, 구토, 이중 시력, 현기증, 마비 등이 나타났고 때로는 사망에 이르렀습니다. 잠수병의 위협 외에도 케이슨의 어둡고 습한 환경에서 일하는 것에 대한 일상적인 공포가 있었습니다.

 결국 강 바닥의 흙은 치워지고 다리의 거대한 탑을 위한 기초를 만들기 위해 콘크리트가 케이슨 내부로 쏟아졌습니다. 그러나 1872년 맨해튼 쪽 케이슨 안에서 작업을 지시하던 워싱턴 로블링은 심각한 잠수병을 앓고 거의 목숨을 잃을 뻔 했습니다.

 워싱턴 로블링이 병에 걸렸지만 절반정도 완성된 교량 건설은 계속되었습니다. 브루클린 탑이 먼저 세워지고 맨해튼 쪽이 뒤를 이었습니다. 워싱턴은 점차 회복되기 시작했지만 평생동안 이 질병의 고통을 겪게 되었습니다.

브루클린 다리(출처 : Pixabay)

 그 해의 나머지 기간 동안 탑은 건설 중에 있었습니다. 메인(Maine) 주에서 채석된 화강암 블록은 커다란 기중기에 의해 자신의 위치로 올라갔습니다. 각 탑에는 90,000톤이 사용되었습니다. 그 해 말까지 브루클린 탑은 약 140피트까지 세워졌는데 완성될 높이의 절반에 이르렀습니다. 맨해튼 탑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듬해인 1873년, 앵커리지에서 작업이 시작되었습니다. 이것들은 다리의 주요 케이블을 땅에 묶는 것이었습니다. 각 앵커리지에서 23톤짜리 앵커판 4개가 석조부분 아래에 묻힐 것입니다. 각각은 교량의 4개의 케이블 중 하나를 고정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브루클린 다리는 하이브리드 케이블로 고정된 현수교입니다. 존 로블링은 2가지의 독립적인 지지 시스템을 이용하여 필요한 힘의 6배나 더 강하게 설계하였습니다. 다리의 서스펜션 부분은 4개의 커다란 케이블을 연결하였습니다. 이것들은 양쪽 끝에 정박되어 탑에 의해 높게 유지되었습니다. 2차적으로 이 케이블로부터 수직 케이블이 다리의 노반까지 연결되어 그 무게를 지탱하게 됩니다.

 서스펜션 외에도 브루클린 다리는 또다른 케이블을 사용했습니다. 이 설계에서 도로를 지탱하는 케이블은 탑 꼭대기에 비스듬히 올라가고 반대쪽은 도로의 다른 부분으로 내려갑니다. 탑은 두 부분의 무게가 균형잡혀 안정적으로 유지됩니다.

 1876년에 앵커리지와 탑이 모두 준비되었습니다. 그 다음 다리에 케이블을 놓아야 합니다. 케이블은 새롭게 발명된 강철 와이어를 사용하기로 결정되었습니다.

 1877년 가을, 다리에 주요 케이블이 설치되기 시작했습니다. 강철 와이어의 각 조각은 브루클린 앵커리지에 부착된 다음 맨해튼 앵커리지까지 두개의 탑 상단을 지나갑니다. 280개의 와이어가 스트랜드(strand)로 짜여졌고 19개의 스트랜드가 모여 하나의 케이블이 되었습니다. 4개의 주요 케이블을 만드는 전체 과정은 약 1년이 걸렸습니다.

 이 프로젝트의 마지막 부분은 다리의 노반을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노반을 지지하기 위한 강철 받침대는 서스펜션 와이어로부터 매달려 있었고 주 케이블로부터 매달려 있었습니다. 1878년 말까지 임시적으로 나무 판자가 대들보 위에 세워져 있어 다리를 건너는 것이 가능했습니다. 이 기념일은 작은 축제가 되었는데 워싱턴 로블링은 병상에 있어 그의 아내인 에밀리 로블링(Emily Roebling)이 첫번째 공식 통행을 하는 영예를 안았습니다.

 1883년 5월 24일 마침내 다리가 개방되었을 때 불행히도 워싱턴은 여전히 자신의 침대에 누워 있었습니다. 그는 다리에서 고위 인사가 연설하는 것을 망원경으로 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행사 참석자 중에는 미국 대통령 체스터 A. 아서와 뉴욕 주지사인 고로버 클리블랜드도 있었습니다. 그는 다리에서 벌어진 축하 행사에 참석할 수 없었기 때문에 프로젝트의 수석 보좌관이 된 아내 에밀리가 자신의 집에서 연회를 열어 워싱턴의 친구들과 고위 인사들을 초대하였습니다.

 다리가 개통된 후 24시간만에 25만명이 다리를 건넌 것으로 추산되었습니다. 그날 저녁에는 화려한 불꽃놀이가 열렸고 신문들은 이 다리를 ‘세계 8대 불가사의’라고 적었습니다. 존 로블링의 비전이 실현되면서 브루클린과 맨해튼을 하나의 도시로 연결하여 뉴욕의 모습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러나 이 경이로움의 대가는 컸습니다. 존 로블링의 삶에 덧붙여 14년의 건설기간 동안 27명의 노동자가 희생되었습니다. 또한 아버지의 웅장한 컨셉을 완료하는 댓가로 워싱턴 로블링은 남은 여생을 매일 고통 속에 살아야 했습니다.

**  증기 시대(the Age of Steam)란? 대략 1770-1914년 사이 산업혁명 기간을 의미합니다. 증기기관의 발명과 함께 찾아온 시기라고 하여 이렇게 불리며 보통 19세기 전후를 가리킵니다.


참고자료 : http://www.unmuseum.org/7wonders/brooklyn_bridge.ht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