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비한 건축물

[증기시대 7대 불가사의] 바다 위에 세워진 벨 록 등대

제이스톤 2018. 9. 13. 12:00

[증기시대 7대 불가사의] 바다 위에 세워진 벨 록 등대(the Bell Rock Lighthouse)

 1799년 12월,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지역의 북동쪽 해안에 끔찍한 폭풍이 불어 닥쳤습니다. 괴물같은 바다는 계류장에 있는 배를 부수고 해안을 넘어 들이쳤습니다. 아직 바다에 있는 배들은 거대하고 거친 파도에 던져지고 부서졌습니다. 폭풍이 치고 3일이 지난 후 약 70척의 배가 가라앉았고 많은 사람들이 사라졌습니다.

 스코틀랜드 Forth 강 어귀의 만(Firth of Forth)은 많은 배들에게 그 엄청난 폭풍으로부터의 피난처를 제공했습니다. 그러나 벨 록(Bell Rock)이라고 불리는 위험한 산호초 때문에 감히 접근하지 못했습니다. 길이가 0.25마일 정도 되는 산호초는 낮시간 동안 잠시 물밖에 노출될 뿐이며 대부분의 시간은 파도 밑에 있어 보이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만의 안전을 위해 만들어진 배의 바닥을 찢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 암초는 매우 위험한 것으로 간주되어 많은 배들이 암초를 안전하게 지나는 것보다 바깥 바다의 폭풍을 타는 위험을 선택했습니다.

폭풍우 치는 벨 락 등대 (출처 : Wikimedia Commons, 미국의회도서관)

 Inchcape Rocks으로도 알려진 이 암초에 대한 두려움은 1799년의 대폭풍이 있기 훨씬 전부터 선원들에게 알려졌습니다. 14세기의 몇몇 소식에 따르면 에버브룩(Aberbrothock)의 대수도원장인 존 게디(John Gedy)와 수도사들이 거대한 종을 가지고 그 암초로 향했습니다. 그들은 암초에 종을 성공적으로 부착했습니다. 파도가 치면 종이 계속해서 울려 퍼지면서 선박들에게 소리로서 경고를 합니다. 그러나 그 종은 네덜란드 해적 Ralph the Rover에 의해 도난당하기 전 단지 1년 동안 암초에 머물렀습니다.

 그러나 종은 한가지에 대해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것은 이 위험한 암초에게 수세기 동안 지속될 이름을 가지게 한 것입니다.

 수백년 동안 암석에 경고 장치를 설치하려는 시도는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18세기 후반에 북부 등대 위원회(Northern Lighthouse Board)가 설립되었습니다. 1795년에는 스코틀랜드 연안에 7개의 주요 등대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만조 때 수심 16피트 아래에 있는 벨 록 암초는 등대를 짓기에 너무 어려운 곳으로 여겨져 왔습니다.

 그러나 로버트 스티븐슨(Robert Stephenson)이라는 젊은 엔지니어는 다르게 느꼈습니다. 스티븐슨은 이사회에서 기존 등대를 검사 및 수리, 조사를 위해 고용되었습니다. 그는 벨 록 암초에 빛을 비추는 아이디어에 흥미가 있었지만 이사회의 많은 회원들은 단순히 불가능하다 여길 것이고 자신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1799년의 비참한 폭풍은 암초에 경고등만 설치할 수 있다면 많은 배와 생명을 구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1800년 11월 그는 마침내 그와 건축가 제임스 홀 데인을 2시간 정도 암초 11마일 근처로 데려다 줄 용감한 어부를 찾아냈습니다.

 두 사람은 썰물에 노출된 부분이 길이 250피트, 너비 130피트이고 사암으로 이루어진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스티븐슨은 기둥으로 지지되는 구조물을 만들 수 있기를 기대했지만 조사를 마쳤을 때 이것이 쿵쾅거리는 폭풍의 파도를 버틸 수 없다고 결론지었습니다. 그대신 스티븐슨은 파이머스(Pymouth) 항구 근처의 에디스톤 등대의 설계 엔지니어인 존 스마톤(John Smeaton)의 책 한 페이지를 가져오기로 결정했습니다.

벨 록 등대 스케치(출처 : Wikimedia Commons)

 에디스톤 등대는 바다에 휩쓸려 노출된 암초에 1759년에 지어졌습니다. 같은 위치에 있던 등대가 두번이나 비극적으로 무너져 내렸지만 스마튼은 그의 설계에서 영리한 방법을 이용했습니다. 가장 강력한 파도에 의해서도 돌들이 갈라지지 않도록 더브테일 조인트와 대리석 못을 가진 무거운 화강암 블록을 결합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또한 등대에 오크나무 줄기와 비슷하게 안쪽으로 곡선 형태의 모양을 주었습니다. 그 구조는 성공적이었고 스티븐슨이 벨 록에서 비슷한 디자인을 사용하도록 영감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벨 록에 등대를 건설하는 것은 에디스톤의 것보다 훨씬 어려움이 예상되었습니다. 에디스톤의 암초는 해수면 위에 있었고 벨 록은 만조 때는 16피트의 수면 아래 있었고 파도 위로 드러났을 때도 불과 4피트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새로운 등대가 에디스톤보다 적어도 20피트 이상 높아야 했고 그에 따라 더 큰 기단부를 가져야 함을 의미합니다. 40피트 폭의 바닥은 타워를 짓기 위해 2,500톤 이상의 석재가 필요했고 스티븐슨은 그 비용이 4,2000파운드가 들 것으로 추정했습니다.

 높은 비용 때문에 등대 위원회는 프로젝트의 추진을 꺼렸습니다. 1804년에 군함인 HMS 요크 호가 정기 순찰 중 실종되었습니다. 나중에 배가 암초에 부딪혀 승선하고 있던 491명과 함께 가라앉았다고 결론지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티븐슨의 계획에 대한 비난은 그가 너무 어리기 때문에 그 어려운 프로젝트를 수행할 수 없다면서 계속되었습니다. 스티븐슨은 영국에서 가장 잘 알려진 토목 기술자 중 한명인 존 레니(John Rennie)에게 자신의 계획에 관한 편지를 보냈습니다. 레니는 스티븐슨의 자료가 인상깊었습니다. 레니가 참여하면서 국회는 등대 이사회가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25,000파운드를 빌릴 수 있는 법안을 통과시켰습니다. 레니는 스티븐슨을 조수로 임명하였습니다.

 레니와 스티븐슨은 설계가 실행가능하다는 데에 동의했지만 프로젝트에 대해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아무도 수중에 그것도 육지와 상당히 먼 곳에 등대를 세우려고 시도한 적이 없었습니다. 어떻게 건설 노동자들에게 숙식을 제공할 수 있을까요?

 등대가 세워질 때 3척의 배가 있었습니다. 고대 알렉산드리아의 등대 이름을 딴 파로스(Pharos) 호는 67피트 길이였으며 건설 중 일시적으로 물에 떠 있는 등대 역할을 할 수 있도록 공사 현장 북서쪽 1.5마일 정도 위치에 정박되었습니다. Smeaton 호는 길이 55피트였는데 이 프로젝트를 위해 만들어졌으며 거대한 화강암 블록을 잘라내어 육지에서 현장으로 운반하는 보급선의 역할을 했습니다. 세번째 Joseph Banks 호는 건설 노동자들의 거처로 활용할 수 있도록 만들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이 배는 승무원이 현장에 도착한 1807년 8월 1일에도 제작 중이었습니다.

오늘날 벨 록 등대 (출처 : Wikimedia Commons, ⓒ Derek Robertson, CC BY-SA 2.0)

 대신 노동자들은 Smeaton호와 Pharos 호에서 숙박을 했습니다. 암초가 노출된 상태에서 하루에 두번씩 썰물 시간에만 작업할 수 있었습니다. 노동자들은 공사가 진행되는 동안 한번에 한달씩 배에서 살면서 작업시기에는 작은 보트를 타고 암초로 노를 저었습니다. Smeaton 호가 계류장을 망가뜨리는 거의 재난에 가까운 일이 발생했습니다. 암초에 붙어있는 노동자들이 밀려오는 조수에 익사하기 전에 돌아올 수 없었습니다. 다행히 보급선이 적시에 육지에서 도착했으며 자포자기한 상태의 노동자들을 보고 구조하였습니다.

 첫번째 시즌의 작업 마지막 날인 10월 6일, 겨울 동안에도 지속되기를 희망하는 노동자들은 옥수수모양의 임시 플랫폼인 비콘 하우스를 마련했습니다.

 스티븐슨이 1808년 5월 25일에 돌아왔을 때 그는 비콘 하우스가 아직 서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와 그의 작업자들이 해야 할 첫번째 작업은 등대의 기초가 될 화강암을 놓을 둥근 구덩이를 굴착하는 것이었습니다. 배에서 그 위치로 돌을 가져가기 위해 스티븐슨은 작업자들에게 300피트 길이의 철로를 놓도록 지시했습니다. 이 작업에 여름 기간이 다 지나고 가을까지 바위는 3단계로 놓였고 등대는 암초 위 4피트 높이로 올라갔습니다.

 건설이 계속되면서 레니는 프로젝트에 시간을 덜 쓰게 되었고 위험하고 어려운 상황이 현장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스티븐슨은 등대를 세우는 데 자신이 더 많은 경험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디자인대로 진행하면서 레니의 디자인을 무시하기도 하는 사실상의 수석 건축가가 되었습니다.

 세번째 기간 동안 비컨 하우스는 확장되었고 몇몇 노동자는 밤에 조셉 뱅크스 호로 돌아가지 않고 이곳에서 잠을 잤습니다. 폭풍이 몰아치는 어느날 저녁에는 그들이 후회했을지도 모릅니다. 강풍 속에서 30시간을 버텼고 비컨 하우스가 약간의 피해를 입었지만 모두 살아 남았습니다. 그 해 여름의 악천후에도 부구하고 8월 말까지 등대의 단단한 바닥이 완성되었습니다. 암초 위에 31피트, 수면 밖으로 나온 부분은 17피트 정도 였습니다.

 1810년 봄, 스티븐슨은 그해 겨울까지 등대를 완성하기로 결심했습니다. 등대가 점점 올라갔을 때 주변을 휘젓는 바람과 좁은 비계(scaffolding, 재료 운반이나 작업을 위해 설치한 임시가설물)에 의해 작업이 더욱 어려워졌습니다. 여러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7월 말에 등대에 마지막 자재를 놓을 때 102피트가 되었습니다.

 8월의 심한 폭풍우로 인해 피해가 발생하여 등대 내부의 설치가 지연되었지만 10월말까지 대다수의 등대 램프, 반사경, 안개등이 설치되었습니다. 한가지 잃어버린 것은 붉은색 유리로 만든 대형 유리 시트였습니다. 이 유리는 빛을 칠하여 식별 코드로 흰색과 빨간 색을 번쩍이며 이것이 벨 록 표지였음을 선박들에게 신호로 보냈습니다.

 1811년 2월 1일에 마지막 자재를 올려서 등대가 완성되었습니다. 이 표지는 1998년에 자동화되었지만 오늘날에도 여전히 작동하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근해의 불빛인 등대가 있습니다. 등대를 설계한 로버트 스티븐슨과 그것을 세웠던 용감한 사람들의 기념비입니다.

**  증기 시대(the Age of Steam)란? 대략 1770-1914년 사이 산업혁명 기간을 의미합니다. 증기기관의 발명과 함께 찾아온 시기라고 하여 이렇게 불리며 보통 19세기 전후를 가리킵니다.


참고자료 : http://www.unmuseum.org/7wonders/bellrock.ht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