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스크랩

임진왜란 때 활약한 ‘원숭이 기병대’는 실존했다

제이스톤 2018. 9. 22. 18:00

임진왜란 때 활약한 ‘원숭이 기병대’는 실존했다

 임진왜란 때 활약했다는 명나라 ‘원병삼백(猿兵三百, 원숭이 병사 300명)’은 실화였을까요? 전설처럼 내려오는 원숭이 부대에 대한 이야기를 다방면으로 접근한 논문이 발표되었습니다. 최근 발간된 역사비평 가을호에 성균관대 안대회 교수의 ‘소사전투에서 활약한 원숭이 기병대의 실체’라는 논문이 실렸습니다.

 안 교수는 이중환의 택리지(擇里志) 정본을 내기 위해 여러 판본을 비교 검토하는 과정에서 원숭이 부대를 접했다고 합니다. 1597년 정유재란이 발발하자 지금의 천안 지역인 소사 전투에서 명나라의 양호 장군이 승리해 일본군의 북진을 차단했습니다. 택리지에는 이 전투와 관련해 “거리가 100여 보가 되기 직전에 먼저 교란용 원숭이를 풀어놓았다. 원숭이는 말을 타고 적진으로 돌진하였다. (중략) 적진으로 바짝 다가서자 원숭이는 말에서 내려 적진으로 뛰어들었다. 왜적들은 원숭이를 사로잡거나 때려잡으려 하였으나 원숭이는 몸을 숨기고 도망다니면서 진영을 꿰뚫고 지나갔다.” 라고 기술되어 있습니다. 소사 전투는 평양, 행주산성 전투와 함께 임진왜란 시기 육군의 삼대 전투로 꼽힙니다.

원병삼백 깃발 아래 원숭이 부대가 묘사되어 있다(출처 : 한국일보, 역사비평)

 안 교수는 소사 전투의 승장인 양호 장군을 칭송하기 위해 왕명으로 연암 박지원이 지은 글 ‘경리 양호 치제문’에도 ‘농원삼백(弄猿三百)이 말을 달렸다’는 구절이 나오는데 적진을 교란하는 300마리의 원숭이 부대에 대한 언급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의병장 조경남이 쓴 ‘난중잡록’에는 소사 전투 이후 남원으로 집결 중이던 유정 부대를 묘사하는 제목이 있습니다. 여기에도 ‘초원(楚猿) 4마리가 있어 말을 타고 다루는 솜씨가 사람과 같았다. 몸뚱이는 큰 고양이를 닮았다’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초원이란 중국 남부에서 온 원숭이라는 의미라고 합니다.

 임진왜란 때 신녕현감을 지낸 손기양이 남긴 일기에도 이 ‘초원’이 나타납니다. 집안의 종을 유정 부대에게 보냈었는데 그 종이 돌아와서는 ‘군대의 위용이 장엄하고 또한 초원(楚猿)과 낙타가 있는데 원숭이는 능히 적진으로 돌진할 수 있다’라고 보고했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안동의 풍산 김씨 문중에 전하는 그림 ‘천조장사전별도(天朝裝士餞別圖)’가 있습니다. 제목 그대로 전쟁 뒤 명나라 군인들이 귀국하는 장면을 담은 그림인데 왼쪽 아래를 보면 원병삼백이란 깃발 아래 원숭이가 그려져 있습니다. 그림에 대한 설명문을 보면 ‘142,305명의 명나라 군사가 살아돌아간다’는 설명과 함께 ‘형초(荊楚)의 청원(靑猿) 300명은 본디 양호가 인솔해 왔는데 직산(소사)전투에서 기용하여 크게 승리를 거두었다’는 구절이 있다고 합니다.

 처음 이 그림이 세상에 알려졌을 때 원병을 날쌘 병사 또는 변장한 병사 쯤으로 해석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여러 문헌을 볼 때 원숭이 부대가 실존했을 개연성은 충분하다는 것이 안 교수의 주장입니다.

 원숭이 부대에 관한 중국 기록은 나타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안 교수는 대신 임진왜란 훨씬 이전 명나라 장수 척계광이 원숭이 부대를 운용했었다는 명나라 기록을 간접증거로 제시하기도 했습니다. 포르투갈 출신 흑인 수군을 해귀(海鬼)라 했는데 조선왕조실록에는 선조가 이들과 대화를 나눈 기록이 있지만 정작 중국 기록에는 언급이 없다고 합니다. 중국 입장에서야 소규모 특수부대까지 일일이 기록할 필요가 없었지만 조선은 이를 신기하게 여겨 기록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설명했습니다.

천조장사전별도(출처 : 한국일보, 역사비평)

 여기까지가 한국일보의 기사 내용이었습니다. 반면에 오마이뉴스에서는 문헌에 등장하는 내용을 바탕으로 임진왜란 때 원숭이들이 전투 현장에 출현하였고 말을 타고 달렸다는 것도 사실이라고 언급하였습니다. 다만 한국일보의 기사가 택리지의 원문을 일부만 인용한 것이라고 지적하였습니다.

 원숭이 부대가 일본군을 혼란스럽게 만든 것은 사실이지만 실제로 일본군을 물리친 것은 명나라 병사들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국일보의 기사에서는 일본군이 당황해한 사실을 소개한 뒤 일본군이 대패했다는 사실을 언급하면서 마치 원숭이 부대가 일본군과 싸운 것처럼 작성되었다고 합니다(그 이후에 기사가 수정된 것인지 오마이뉴스에서 언급하는 내용은 찾을 수 없었습니다). 이는 원숭이 부대의 실제 기여도를 과장되게 인식할 수 있는 부분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SR타임즈라는 사이트에서는 안교수의 논문에 대해 과학적인 근거를 ‘전혀’ 제시하지 못했다고 비판하고 있습니다. 옛 시대상을 파악하려면 문헌을 참고하는 것이 과학적인 방법 아닌가요? 당시에 사진기가 있었던 것도 아닌데 어떤 과학적 근거를 제시해야 하는지 되묻고 싶습니다. 종이에 문자나 그림으로 기록을 남기는 것이 최선이었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기록이 하나만 남아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 곳에서 일관되게 기술되어 있다면 사실로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게다가 천조장사전별도에 나타난 원숭이 묘사 부분에 대해서 ‘하나같이 팔다리가 모두 길고 사람처럼 직립하는 모습이다. 사람과 비슷한 신체구조이다. 깃발도 들고, 창도 들고 질서정연하게 행진한다. 우두머리가 대열 바깥에서 지시를 내리는 듯이 보인다. 언어를 사용한다는 의미이다’라고 적고 있습니다.

 이것은 과학적인 분석인지 의문이네요. 나라를 지켜준 고마운 존재를 떠나보내는 그림이니 용맹하고 늠름하게 묘사하는 것이 당연할 텐데 그렇다면 이 모습이 과장되어 있을 가능성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제 생각에는 서서 걷는 모습이 사람이라거나 지휘하는 모습을 보고 언어를 사용한다는 가정은 무리라고 보입니다.

 SR타임즈의 기사에도 한가지 흥미로운 점이 있었습니다. 부산대 조흥국 교수의 저서를 바탕으로 원숭이 부대가 태국 아유타야의 군대일 가능성을 제기하였습니다. 명신종실록(明神宗實錄)의 기록에 따르면 ‘1592년에 일본이 조선을 쳐부수자 시암(아유타야 왕국)은 몰래 군대를 출동하여 일본을 바로 쳐 그 후방을 견제하겠다고 청하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원숭이 이미지(출처 : Pixabay)

 조선의 선조실록(宣祖實錄)에도 명나라에서 돌아온 사신이 태국이 명나라 조정에 조선을 구하겠다는 청원을 전했다는 대목이 있습니다. 일본의 침공 정보를 사전에 입수한 명나라 조정은 1591년에 이미 조선에 태국, 류큐(현 오키나와 지역) 등의 나라들과 연합하여 일본을 토벌하라고 요구한 사실도 있다고 합니다. 임진왜란 발발 이후 아유타야 왕국은 10만 병력을 일으켜 일본을 정벌하려는 논의가 구체적으로 진행되기도 했다는군요.

 이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이 존재합니다. 당시 아유타야 왕국의 나레수안 국왕은 미얀마의 침공을 막아야 했고 캄보디아 정복 계획이 있어서 멀리 떨어진 조선으로 출병할 여력이 거의 없었다는 것입니다. 아유타야 왕국이 국가차원에서 참전했다는 기록도 없다고 합니다.

 아유타야 왕국이 조선의 전쟁에 참가하려 한 것은 부의 근원인 동남아 무역과 명나라 시장이 일본에 장악되는 것을 우려한 것이라는 분석도 있습니다.

 아유타야 병사가 맞다면 이를 원숭이 부대로 표현한 이유에 대해서 조선의 선비들이 동아시아 사람들과 외모가 다른 아유타야 병사들을 보고 원병이라고 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합니다. 명나라 장수들이 원숭이처럼 날랜 남방 출신의 병사들을 원병이라고 표현했을 가능성도 있으며, 한자를 모르는 아유타야 왕국 출신 병사들을 낮잡아 원병이라고 했을 수도 있다고 합니다.

 제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오마이뉴스에서 언급된 것처럼 실제 원숭이 부대가 존재하기는 했으나 적에게 혼란을 주는 목적 정도로 운용되었지 않나 싶습니다. 맹수나 코끼리 부대가 존재했었던 사실을 보면 원숭이 부대도 충분히 존재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됩니다.


- 관련 기사 보기 :

http://www.hankookilbo.com/News/Read/201809051698016614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470022

http://www.srtimes.kr/news/articleView.html?idxno=236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