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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신비

상상 속 코로 걷는 생물, 비행류

상상 속 코로 걷는 생물, 비행류

 남태평양 하이아이아이 군도에 서식했다는 전설의 동물 비행류(鼻行類, Rhinogradentia, 코걸음쟁이). 비행류는 독특한 신체구조와 행동양식을 가지고 있는데 포유동물에 속하며 마치 물구나무를 선 모습으로 코를 이용해 움직이는 특이한 동물이다.

 이 기이한 동물은 1957년 독일에서 “코걸음쟁이의 생김새와 생활상(Bau und Leben der Rhinograndentia)”이란 책이 출판되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책의 저자는 하랄트 슈튐프케(Harald Stümpke)라는 사람으로 되어 있다.

비행류 모르겐슈테른나조벰(비행류 중 모르겐슈테른나조벰 - 출처 : newssc.co.kr)

 이 책이 출판되고 독일에서는 당시 생물학도들 간에 이 동물군에 대한 논쟁이 끊이지 않았고 심지어 교과서나 의학백과사전에 인용될 정도로 그 영향력은 대단했다. 우리나라에서도 각종 과학 잡지와 신문 기사에도 오르내릴 만큼 반응이 뜨거웠다.

 비행류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코의 생김새로 무리를 특징짓는다. 크게 코가 하나이거나 코가 여러 개 있는 군으로 분류된다. 코가 여러 개인 경우는 척추동물 계통선상에서 유일한 것이다. 비행류는 총 14개 과에 총 189종이 있다. 원시비행류를 제외한 비행류에서는 코를 이동수단으로 사용함에 따라 기존의 다리들은 본래의 기능을 상실하였으며 뒷다리는 대부분 퇴화되었다.

 비행류의 앞다리는 먹이를 움켜쥐거나 털고르기에 적합하도록 변형되었다. 일반적으로 꼬리가 두드러지게 발달되었고 감긴 꼬리나 올가미 모양 등 특이한 형태를 보인다. 비행류의 몸은 대부분 고른 털로 덮여 있으며 털 색깔도 매우 화려하다. 몸집이 작은 비행류들은 대체로 곤충을 잡아먹고 사는데 일부는 열매를 먹거나 사냥을 하는 부류도 있다.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비행류 가운데 날 수 있는 것들도 있다.

 일반적으로 비행류의 번식은 왕성하지 않다. 평균 7달 동안 임신을 한 후에 새끼 한 마리를 낳는다. 코가 하나인 종류는 젖을 먹일 필요가 없을 정도로 다 자란 상태의 새끼를 낳고 코가 여러 개인 종류는 아직 덜 자란 상태의 새끼를 낳는다.

비행류, 하이아이아이 군도(하이아이아이 군도)

 이 비행류는 1941년 태평양 전쟁 중 남태평앙 하이아이아이 군도(Hi-Iay Islands)에서 일본군 포로였던 스웨덴 병사가 우연히 발견했고 현재까지 이 섬에서만 서식한다고 알려졌다. 군도에 있는 마이루빌리 섬에는 하이아이아이 다윈 연구소가 있어 비행류에 관한 연구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하이아이아이 군도에서 200km 떨어진 해상에서 벌어진 핵실험 때문에 해수면 아래로 가라앉고 말았다. 이 때 연구소가 있는 마이루빌리 섬에서 국제학술 회의가 개최 중이었는데 비행류는 물론 관련된 학자들, 연구자료도 모두 사라지고 말았다.

 지금껏 설명한 내용은 "코걸음쟁이의 생김새와 생활상"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놀랍게도 비행류는 독일 시인 크리스티안 모르겐슈테른(Christian Morgenstern, 1871~1914)의 시에 나오는 ‘나조벰(Nasobem, 코로 걷는 짐승)’을 바탕으로 만들어낸 상상의 생명체이다. 원저자는 하이델베르크대학의 게롤프 슈타이너(Gerolf Steiner) 교수인데 전체적인 이야기가 논리적이고 생김새와 특징에 따라 짜임새있게 분류된 계통도를 보면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상상력만으로 이런 생물을 만들어냈다는 것 자체가 불가사의인지도 모르겠다.

 한국어판을 번역한 역자는 독일 유학 중에 이 책을 처음 접했다고 한다. 책에 나오는 참고문헌을 도서관에서 직접 찾아보기로 하고 아무리 뒤져보았지만 찾을 수 없어 책의 후기를 쓴 슈타이너 박사를 찾아갔다고 한다. 그녀가 찾아온 이유를 말하자 슈타이너 박사는 한쪽 구석으로 가더니 키득키득 한참 동안을 웃었다는 일화도 있다.

 뛰어난 유머감각이 반영된 동물명 및 지역명은 모두 슈타이너 교수의 창작물이며, 참고문헌 목록의 자료들까지도 대개가 허구이다. 사실 참고문헌에 나오는 논문의 저자들도 라틴어에 해박하고 영어, 프랑스어, 스페인어를 구사하는 슈타이너 교수가 지어낸 가공의 인물로 주정뱅이, 난봉꾼, 멍청이 등의 뜻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예를 들면 1946년 ‘비행류 코의 해부학적 조직학적 고찰’이라는 논문을 발표한 ‘비트브레인(Bitbrain)’이라는 학자의 이름은 ‘골빈 녀석’이라는 뜻이다.

비키니 핵실험(비키니 핵실험, 1946년 - 출처 : Wikimedia Commons)

 ‘하이아이아이’라는 말은 놀라거나 충격을 받았을 때 내지르는 영어라고 한다. 개인적으로는 1946년부터 1958년까지 미국의 핵실험 장소로 쓰였던 태평양의 비키니 섬(비키니 환초, Bikini Atoll)에서 모티브를 딴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2차 세계대전 때 스위스와 함께 중립을 지킨 스웨덴 국적의 병사가 일본군에 포로로 잡혔다는 설명도 지어낸 이야기임을 알 수 있다.

 비록 하이아이아이 군도가 실제로 존재했었는지, 정말 원자폭탄 때문에 바닷속으로 가라앉았는지는 알 수 없다. 비행류가 실제 존재한다는 주장도 있고 일본에서 길러지고 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모두 확인된 바 없다.

** 비행류라는 용어가 일본에서 사용하는 것을 그대로 들여온 것 같은데 우리말로 코걸음쟁이라고 하는 것이 더 맞는 표현인 것 같다. 하지만 이미 비행류라는 말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아 본문에서는 비행류로 표기하였다.


참고자료 : 코걸음쟁이의 생김새와 생활상(2011년, 하랄트 슈튐프케 저, 박자영 역, 북스힐)

https://namu.wiki/w/비행류

http://www.newssc.co.kr/news/articleView.html?idxno=395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