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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터리 인물편

스탈린과 비운의 2인자 니콜라이 예조프

 가난한 노동자 출신이었던 니콜라이 예조프는 1915~1917년까지 러시아 제국군에 징집되어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였습니다. 1917년 5월 볼셰비키에 가담했고 반혁명군과 전투를 벌였습니다. 내전이 끝난 이후 소련 공산당의 여러 지역위원회에서 서기로 일했습니다.

니콜라이 예조프(출처 : Wikimedia Commons)

 그러던 중 1936년 소련의 비밀경찰조직인 내무인민위원회 위원장에 임명되었습니다. 내부인민위원회는 스탈린에 반대하는 인사들을 색출하여 처벌함으로써 스탈린 정권을 강화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습니다. 예조프는 스탈린에게 아낌없는 충성을 바쳤는데 그를 위해 반대파를 처단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의 첫번째 임무는 전임 내무인민위원장이었던 겐리흐 야고다를 체포하여 조사하는 것이었습니다. 야고다는 스탈린의 경쟁자였던 부하린과 연합하여 남몰래 세력을 키워가던 중이었고 이를 알게된 스탈린은 그를 위원장에서 해임시켰던 것입니다.

 

 예조프는 의욕적으로 조사를 펼쳤고 제보자의 증언과 관련 증거를 조작하여 야고다를 반역죄로 기소하였습니다. 혹독한 고문에 시달린 야고다는 결국 혐의를 인정하고 사형은 선고받아 처형되었습니다.

 이후 예조프는 무자비한 ‘피의 대숙청’을 시작했습니다. 공산당 내의 스탈린 반대파는 물론이고 정권에 해가 된다고 판단되는 인물이 있으면 무자비하게 잡아들인 후 고문하고 처형했습니다. 1937~1938년 2년 사이에 50~75%의 고위 공산당원과 붉은 군대 장교들이 처형되거나 시베리아에 있는 수용소로 끌려가 강제노역형을 받았습니다. 이들 중에는 예조프가 임의로 할당한 체포자 숫자를 채우기 위해 무고하게 끌려온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스탈린

 같은 기간 동안 154만명이 체포되고 그 중 134만명이 유죄선고를 받았으며, 무려 68만명이 처형되어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151cm의 작은 키를 가진 예조프를 ‘피의 난쟁이’, ‘독기 품은 난쟁이’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내무인민위원회 설치 20주년 기념식이 있었던 1937년 12월 예조프는 권력의 정점에 올랐습니다. 볼쇼이 극장에서 열린 이 행사에서 스탈린은 자신의 초상화와 예조프의 초상화가 나란히 걸린 모습을 목격하고 예조프의 정치적 야망을 의심하기 시작합니다.

 숙청 작업 이후에 예조프의 힘이 점점 커지고 있음을 직감적으로 느꼈습니다. 스탈린은 자신에 맞설 수 있는 세력은 그 규모가 커지기 전에 싹을 잘라 왔는데 예조프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스탈린은 무고한 시민을 학살했다는 이유로 예조프를 내무인민위원장에서 해임하였습니다.

 새로운 내무인민위원장으로 임명된 라브렌티 베리야는 예조프를 반역죄로 체포하였습니다. 예조프는 고문을 받고 정부기금 착복, 독일 스파이들과의 연계, 직무 소홀 등을 자백하였습니다. 결국 사형을 선고받은 예조프는 1940년 2월 4일, 모스크바 인근에서 비밀리에 처형되었습니다.

 그의 시신은 화장되어 공동묘지에 버려졌으며, 1948년까지 그의 죽음은 최고 비밀로 분류되었습니다. 또한 스탈린은 예조프의 존재를 완벽하게 지우라고 명령했습니다. 사진에서도 그의 모습은 사라졌으며 모든 기록은 폐기되었습니다. 독재자 스탈린에게 충성을 다했으나 대학살을 주도한 살인마로 기록된 예조프는 비참하게 버림받고 처형당한 비운의 2인자였습니다.

참고자료 : 서프라이즈 인물편(2016년, 신비한TV 서프라이즈 제작팀 저, MBC C&I, p112-114)
https://ko.wikipedia.org/wiki/니콜라이_예조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