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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터리 인물편

루마니아를 강대국으로! 니콜라에 차우셰스쿠

 루마니아의 정치가인 니콜라에 차우셰스쿠(Nicolae Ceausescu)는 1967년 국가평의회 의장이 된 이후로 1985년 4선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그는 독재자로 군림하면서 강력한 정책을 여러가지 시행하였으나 결과적으로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습니다.

니콜라에 차우셰스쿠(출처 : Wikimedia Commons)

 1967년 최고의 권력자가 된 이후에 루마니아를 세계에서 가장 부강한 나라를 만들겠다며 인구 증가 정책을 내놓았습니다. 인구가 늘어나면 생산력이 높아지고 군사력도 강해져 부강한 나라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고, 한 가정에 무조건 4명 이상의 자녀를 낳도록 하였습니다.

 이와 함께 이혼 금지령을 내렸는데 사이가 좋지 않은 부부들은 차선책으로 별거를 선택했습니다. 차우셰스쿠는 계획에 차질이 생기자 의도적으로 부부 관계를 갖지 않고 아이를 낳지 않는 부부에게는 연소득의 25%를 세금으로 부과하였습니다. 신체적 문제로 인해 아이를 가질 수 없는 부부에게도 10%를 세금으로 내도록 했습니다. 이를 확인하기 위한 경찰 조직을 만들어 부부가 아이를 갖지 못하는 것이 의도적인지 여부, 은밀한 부부의 사생활에 대한 조사 등을 실시하였습니다.

 이를 피하기 위해 이웃 헝가리로 망명하는 사람들이 늘어났고 망명으로 인해 오히려 인구가 감소하게 되자 차우셰스쿠는 망명을 위해 다뉴브 강을 건너는 사람들을 모두 사살하라는 명령을 내리기도 하였습니다.

 차우셰스쿠의 정책은 1970년대 루마니아의 출산율을 이전의 2배로 높였습니다. 그런데 출산율 증가와 비례해서 유아 사망률도 증가하였습니다. 어린 아이들을 위한 병원, 의약품, 의료진 등 제반 요건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급격한 출산 증가가 원인이었습니다.

부쿠레슈티 거리의 선전포스터(출처 : Wikimedia Commons)

 얼마 후 루마니아 정부는 늘어난 인구를 수용할 학교 건설, 일자리 창출 등의 문제에 직면하면서 심각한 재정난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이때 차우셰스쿠는 새로운 정책을 생각해 내는데 그것은 수입 금지 정책이었습니다.

 수입으로 인한 지출을 없애고 수출로 인한 이익을 극대화하면 나라가 부강해질 것이라는 논리였습니다. 이 정책은 루마니아의 무역수지 흑자를 가져왔지만 정작 루마니아 국민들은 극심한 생활고에 시달리게 됩니다. 생활에 필요한 공산품의 수입이 제한된 데다 자국에서 생산된 농수산물을 모두 수출해서 먹을 것이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결국 루마니아 곳곳에서는 차우셰스쿠의 정책에 반발하는 반정부 운동이 확산되기 시작했습니다. 차우셰스쿠는 반정부시위에 대해 무자비한 유혈진압을 강행해 왔고, 1989년 12월 21일 차우셰스쿠의 대 인민 담화 연설 현장에서 루마니아 혁명의 시작을 알리는 폭발 사건이 발생하였습니다. 이때 시위를 주도한 세력은 그의 인구증가 정책으로 태어난 세대, 이른바 ‘차우셰스쿠의 아이들’이었습니다.

1971년, 김일성과 차우셰스쿠(출처 : Wikimedia Commons)

 정부의 무능력 때무에 제대로된 복지 혜택을 받지 못했던 그들은 교육과 취업의 기회조차 얻지 못하고 대부분 가난하게 살아갔습니다. 루마니아를 강대국으로 만들겠다며 황당한 정책을 쏟아냈던 차우셰스쿠는 1989년 12월 25일에 아내 엘레나와 함께 총살형에 처해졌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의 정책으로 태어난 아이들 때문에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참고자료 : 서프라이즈 인물편(2016년, 신비한TV 서프라이즈 제작팀 저, MBC C&I, p124-1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