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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불가사의

최고(最古)의 목판인쇄물, 무구정광대다라니경

최고(最古)의 목판인쇄물, 무구정광대다라니경

 1966년 10월 14일 경주 불국사 석가탑 보수공사 중 옥개석을 들어 올리다가 그만 실수로 떨어뜨려 한쪽이 깨지고 말았다. 그런데 깨진 틈 사이로 그 안에 들어 있던 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이 발견되었다.

 다라니경은 원래 탑을 쌓은 다음 불경을 염송하여 성불한다는 뜻에서 만드는 경전(기도문)으로 옛부터 탑 속에 다라니경을 넣는 것이 풍습처럼 되어 왔다. 무구정광대다리니경은 죄나 허물을 소멸시켜 맑고 깨끗하게 해주는 진언을 담은 경전이라는 의미이다.

무구정광대다라니경(무구정광대다라니경 - 출처 : 네이버백과, 문화재청)

 다라니경은 가로 52cm, 세로 6.7cm가량되는 닥나무로 만든 종이를 12장 이어 찍은 7m정도되는 두루마리 형태의 인쇄물인데 각 행마다 7-9자씩 문자를 목판으로 인쇄했다. 목판 전체에 글자를 새기고 종이를 얹어 인쇄한 본격적인 의미의 목판 인쇄물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되었다. 국보 제 126호로 지정되어 있다.

 다라니경의 인쇄 시기를 알 수 있는 것은 석가탑의 건립 연대가 분명하기 때문이다. 석가탑은 751년에 건립되었으므로 그 속에서 발견된 다라니경의 인쇄 시기는 최소 751년 이전으로 올라간다. 중국의 금강경보다 117년 이상 앞선 유물인 것이다.

 이전까지 가장 오래된 인쇄 유물은 영국의 고고학자 스타인이 중국 둔황에서 발견한 금강반야바라밀경(금강경)인데 중국인 왕개가 부모의 명복을 빌기 위해 인쇄한 것으로 그 발행시기는 868년이다.

 다라니경의 발견은 학자들 사이에 큰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중국의 것보다 100년 이상 앞선 인쇄물이 신라에서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학자들은 쉽게 인정할 수 없었다. 이에 대해서는 국내 학자들 사이에서도 적지 않은 견해 차이와 논쟁이 있었다. 그러나 다라니경의 인쇄 시기를 밝히려는 연구 노력을 계속하여 마침내 706년에 인쇄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중국 학자들은 다라니경이 중국에서 인쇄되어 신라로 건너갔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702년에 당나라 낙양에서 인쇄되어 신라로 전해졌다는 것이다. 그 근거로 690-704년에 재위한 당나라 측천무후가 특별히 만들어 쓴 무주제자가 무구정광대다라니경에 8번 나온다는 점을 들고 있다. 곧 측천무후 때 쓰던 글자가 나오는 것은 중국에서 인쇄되었다는 증거로 이를 신라에서 수입하여 탑안에 봉안한 것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무주제자는 측천무후가 죽은 뒤에도 약 100년 동안 쓰여진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고려시대에서 사용되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중국측의 주장은 그 근거가 부족하다.

 8세기 초 당나라는 글자체에서 격식과 질서를 중요시했는데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 중국에서 넘어온 것이라고 하기에는 아주 자유분방한 필체를 구사하고 있다는 점이 지적되었다. 다라니경은 글자 크기에 구속되지 않고 한 행에 7-9자를 자유롭게 배열했을 뿐 아니라 글자의 좌변과 우방도 불규칙하다.

 무구정광대다라니경 제3장 3행 마지막 글자의 편린인 조(照)를 고려대장경 등의 내용과 비교한 결과, 북위 시대에 사용한 조 자로 판명됐다. 이는 다라니경이 중국에서 인쇄되었다는 중국 측 주장을 뒤엎는 것으로 당시 황제인 측천무후의 성이 조씨임을 감안하면 당시 중국에서는 피휘(황제의 이름이나 성을 피해 한자를 사용하는 것)로 이 글자를 쓸 수 없었다. 따라서 이 점만 보아도 중국에서 제작되지 않았다는 것을 명백하게 알 수 있다.

불국사 석가탑(불국사 석가탑 - 출처 : SBS웹사이트)

 중국의 종이 문제에 대해서 고구려 담징이 일본에 종이를 전하는 등 이미 6세기 이전에 한반도에서 닥나무 종이가 생산되었다는 역사적 증거들이 있다. 문화재청에서 다라니경을 보존처리하면서 그 재질을 분석한 결과 닥종이라는 사실을 밝혀내 이런 주장에 힘을 실어 주었다.

 또, 당시 신라에 닥종이 제조 기술이 없었다는 중국 측 주장과는 달리 삼국시대 종이류를 정밀 분석한 결과 신라가 이미 8세기 전후로 두께 0.019mm의 종이를 만들 수 있을 정도로 훌륭한 제조 기술을 보유하고 있었다는 점도 입증되었다.

 그리고 당시 신라의 먹은 질이 좋아 중국에 수출하고 있었다. 인쇄술에서 가장 중요한 종이와 먹의 제조기술이 있었던 점으로 미루어 보아 신라에서 인쇄술이 발전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어 있었던 셈이다.

 경주시 구황리 황복사지 삼층석탑에서 발견된 사리외함에 새긴 글씨(706년 제작)와 다라니경의 마지막부분의 필체가 같은 사람이 쓴 것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동시에 글자체가 당시 중국과는 다른 신라 특유의 필체이며 제작시기 또한 사리함 제작시기와 같은 706년으로 올라간다. 사리외함의 기록을 볼 때 상한선을 706년, 하한선을 무주제자의 사용이 완전히 중지된 722년으로 보아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2005년 9월, 고려 초인 1038년 무렵에 불국사 석가탑을 중수하면서 그 내력을 적은 불국사 서석탑 중수형지기와 무구정광대다라니경으로 추정되는 사경(붓으로 베껴 적은 불경) 조각이 발견되면서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 고려시대에 제작된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중수기에서 석가탑을 '무구정광탑'이라는 명칭으로 언급한 것을 보면 이 탑이 무구정경이라는 불경의 내용을 바탕으로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통일 신라 시대에는 무구정경 사상에 따라 석탑을 조성한 반면 고려 전기에는 보협인다라니경을 바탕으로 탑을 만들었다. 다시 말해 석가탑과 무구정광대다리니경이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졌다는 사실이 중수기를 통해 확인된 것이다.


참고자료 : 한국 7대 불가사의(2007년, 이종호 저, 역사의아침, p208-229)

한국7대 불가사의
국내도서
저자 : 이종호
출판 : 역사의아침 2007.0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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