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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불가사의

진포대첩과 고려수군의 함포

세계 최초의 함포 해전, 진포대첩(진포해전)

 서양에서는 함포 해전을 근대 해전의 분기점으로 본다. 1571년에 베네치아, 제노바, 스페인의 연합함대가 오스만 투르크 함대와 레판토에서 격돌한 레판토 해전을 근대 함포 해전의 효시로 본다. 그런데 레판토 해전보다 무려 190년이나 앞서, 고려의 최무선은 화포를 선박에 장착하여 적선을 격파하는 함포 해전을 세계 최초로 선보였다.

레판토 해전(레판토 해전 - 출처 : 유튜브 캡처)

 옛날 수군이 해전을 벌일 때 구사하던 전술이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뱃머리의 수면 아래 뾰족한 충각을 달고 적선의 옆구리를 찔러 침몰시키는 충파 전술이다. 이 전술은 고대 그리스나 로마에서 쓰던 전법으로 19세기 초 트라팔가 해전에 이르기까지 서양에서는 오랫동안 사용됐다.

 둘째는 적선에 접근하여 기어올라 백병전으로 적선을 송두리째 점령하는 보딩(Boarding) 전술이다. 이는 육전과 백병전에 능한 나라가 좋아하는 전술로 로마가 이 방법으로 카르타고 해군을 제압했으며 해적들도 약탈할 때 주로 이 전법을 썼다. 이때 전투의 성격은 해전이 아니라 육지전과 같고 배에 타고 있는 전투원의 수적 우위에 따라 전투의 결과가 달라진다.

 고려 말 우리나라를 침탈한 왜구는 칼을 들고 벌이는 백병전에 능했으므로 재빠르게 적선에 다가가 기어오르는 육박전에 치중했다. 고려군는 왜구가 침입하면 일단 그들을 육지에 상륙시키는 육지전 위주의 전술을 펼쳤다. 해전 방식으로 상대하자면 어디서 기습할지 몰라서 고려군이 수적 우위를 유지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전술은 모든 해안을 방어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군사들의 훈련도 부족하여 고전을 면치 못했다.

 고려 조정은 왜구를 소탕하기 위해 육지전에서 해전 위주로 전술을 바꾸고 선박을 건조와 강력한 수군 조직 등을 단행했다. 그러나 기존과 같은 함선으로는 왜구의 침입을 막는데 한계가 있었다. 이에 함선을 개조하였는데 적들이 아군 배에 기어오르지 못하도록 창과 칼을 뱃머리에 꽂았다. 그리고 선수에 철로 된 충각을 달아 적선을 들이받아 격파할 수 있도록 했다.

최무선(최무선 - 출처 : YTN 캡처)

 또 하나는 최무선이 제안한 것으로 함선 내에 화포를 장착하여 바다에서 왜구의 배와 직접 접촉하지 않고 격파하는 방법이었다. 하지만 이런 전술을 구사하려면 대향 화약 무기의 제작과 거기에 필요한 대량의 화약을 확보해야 했다.

 최무선 이전에도 고려에서 화약무기를 사용하였지만 대량생산을 하지 못하였다. 화약을 개발한 최무선은 이를 이용한 무기인 화전과 화통 등을 만들어 실험한 후 자신감을 얻자 화약과 각종 무기를 만드는 화통도감의 설치를 건의했다. 1377년 고려는 화약 무기를 본격적으로 개발하는 화통도감을 설치하고 최무선을 제조관으로 임명했으며 이어 화통방사군을 조직했다.

 최무선은 화약의 국산화에 성공하고 화통도감의 제조관으로서 화약 무기를 만들어 왜구의 침입에 대비했다. 하지만 화포를 함선에 장착하는 것은 생각만큼 쉽지 않다. 배에서 화포를 발사하면 배는 큰 충격을 받게 되고 심한 진동으로 배가 뒤집힐 수 있다. 이러한 진동과 흔들림은 배의 내구성을 해칠 뿐 아니라 화포의 명중률에도 영향을 주게 된다.

 고려 수군의 화포가 그 위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은 고려의 탁월한 조선 기술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이다. 고려 시대에 들어와 해상 활동이 활발해지자 조선술과 항해기술이 크게 발달했다. 우리나라 서해와 남해의 파고를 고려할 때 안전한 항해를 위한 선박의 최소 길이는 25-30m 가량으로 추측되는데 이 정도 규모의 배를 건조할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조선 기술이 우수했다는 것을 증명한다.

진포대첩(진포대첩 - 출처 : YTN 캡처)

 고려 우왕 6년(1380), 아키바쓰가 이끄는 왜구 2만여명이 500여척의 배를 끌고 진포(지금의 군산)에 상륙하여 내륙을 휩쓸고 다녔다. 고려 조정은 도원수 심덕부, 상원수 나세와 함께 최무선을 부원수로 삼아 전선 100척을 동원하여 왜구를 토벌하라고 명했다.

 왜구는 마침 주력이 이미 상륙한 상태에서 선박들을 모두 연결하여 항구에 정박해두고 있었다. 이때 최무선이 개발한 각종 화약 무기로 무장한 고려 군함이 나타난 왜구의 선박에 포격을 가했다. 왜구의 500여척의 선단을 모두 침몰시키고 포로로 잡혀 있던 고려인 330명을 구출했다.

 진포대첩은 우리 역사상 자체 생산한 화약과 화포로 무장한 수군이 치른 최초의 해전이라는 점, 세계 해전 전술상 화포를 장착한 전함이 투입되어 함포 공격을 감행한 최초의 전투라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갖는다.

 190년 뒤 레판토해전에서 화포가 사용되었고, 이후 세계 해전술의 흐름은 화포를 적극 활용하는 방향으로 전개된다.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비롯하여 영국과 프랑스의 해군도 화약 무기를 설치한 선박과 전법을 도입하여 해상을 누볐다. 역사의 주도권은 바다를 누비는 국가가 차지하게 되었고 이는 근대 역사의 시발점이 되었다.


참고자료 : 한국 7대 불가사의(2007년, 이종호 저, 역사의아침, p252-2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