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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불가사의

고구려의 철갑기병, 개마무사

고구려의 철갑기병, 개마무사

 고구려는 강력한 군사 국가였다. 중국을 상대로 한 전쟁에서 거듭 승리를 거두고 한반도 북부와 만주에 걸쳐 광대한 영토를 가진 대제국을 이루었다. 고구려인 특유의 야망과 기상은 드넓은 중원 대륙을 마음껏 누리기에 부족함이 없었으며, 끊임없이 도발해오는 외부의 적들을 막아내는 전쟁을 마다하지 않았다. 고구려가 막강한 군사 대국으로 발돋움할 수 있었던 중심에는 '개마무사'가 있었다.

고구려 개마무사(개마무사 - 출처 : 나무위키)

 고구려의 주력부대는 개마무사(鎧馬武士)로 구성되어 있었다. 개마란 기병이 타는 갑옷을 입힌 말을 이르며 개마에 탄 중무장한 기병을 '개마무사'라 했다. 함경도에 있는 개마고원이 고구려의 개마무사들이 말 달리던 곳이라는 사실에서 유래한 지명이다.

 고구려의 개마무사는 말과 기사 모두 강철 갑옷으로 무장했는데 강력한 공격력과 장갑을 자랑하는 개마무사의 주된 임무는 적진 돌파와 대형 파괴였다. 개마무사는 현대로 치면 탱크와 같은 역할을 수행했다고 할 수 있다. 말과 기사의 갑옷과 체중에 말을 달린 탄력까지 합하여 적에게 돌진하면 적의 보병 대형은 쉽게 허물어졌다.

 개마무사의 주무기는 창이다. 이 창은 보병의 창보다 길고 무거운데 기병용 창을 삭(槊)이라 한다. 중국식 삭은 길이가 보통 4m 정도인데 반해 고구려 군의 삭은 평균 길이 5.4m에 무게는 6-9kg이었다.

 말까지 강철 장비로 무장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점을 시사한다. 사실 기병이 아무리 용맹하더라도 말이 부상당한다면 전투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으므로 말의 안전은 기병 못지않게 중요하다. 당시에 말과 사람을 위한 갑옷을 강철로 만드는 것은 결코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이는 고도로 발달한 철기 문명 수준과 경제력이 뒷받침되어야 가능한 일이다.

 개마무사의 활약상에 대해 동천왕(재위 227-248년) 때의 기록이 있다. 당시는 위·촉·오의 3국이 대립하던 시기였는데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에 따르면 [...왕은 보기병 2만을 인솔하여 비류수 위쪽에서 방어하며 적 3,000명을 죽였다. 철기(鐵騎) 5,000을 인솔하여 적을 토벌했다.]고 전한다. 고구려가 막강한 철기병으로 당대의 패자 중 하나인 위나라를 격파한 것이다.

삼실총 벽화의 개마무사(삼실총 벽화의 개마무사 - 출처 : 동아일보)

 이 때 동천왕이 동원한 철기병 곧 개마무사 5,000명을 무장시키는 데 필요한 철의 양을 추정해 보면, 개마무사 1인당 말 갑옷 최소 40kg, 장병의 갑옷 20kg, 기타 장비 10kg을 휴대한다고 하면 최소 70kg의 철이 소요된다. 이런 식으로 5,000명을 무장시키려면 단순하게 계산하더라도 350톤의 철이 필요하다. 현대의 제철 기술로는 이것이 그다지 많은 양이 아니지만 그 당시에 이 정도의 철을 생산하는 것은 대단한 일이었다.

 중국이 개마무사의 위용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이를 운용하지 않은 이유로 학자에 따라 중국 특유의 전술에 기인한다는 설명도 있지만 다른 요인으로는 중국의 제철 능력에 한계가 있었다고 본다.

 반면 고구려는 고조선에서 독자적으로 발전한 제철 기술이 전수되었고 또 만주에서 질 좋은 철광석이 생산되었으므로 주력보대를 개마무사로 무장하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많은 학자들이 중장기병의 기원을 강력한 기마 민족인 스키타이로 간주한다. 이들은 기원전 3-2세기부터 동유럽 지역에서 공포의 기마 민족으로 악명을 떨쳤다. 그러므로 이들과 인접한 아르메니아, 파르티아, 페르시아 등도 중장기병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스키타이를 이은 사르마티아도 중장기병을 운용했다.

 당시 마갑은 전형적인 찰갑(札甲, 비늘갑옷) 형태이며 머리, 목, 몸통의 세부분으로 구성되어 있고 몸통 부분은 말 전체가 아니라 안장의 앞부분 절반만 감쌌다. 반면에 고구려의 개마무사는 말의 몸통 전체를 철갑으로 둘렀으므로 이들을 정통 중장기병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십자군전쟁(십자군전쟁 - 출처 : 국제기독교뉴스)

 서양에서 말의 몸통 전체를 철갑으로 두른 정통 개마가 처음 등장한 시기는 11세기 십자군 원정 때로 추정한다. 고구려의 개마무사보다 800년이 늦었다. 십자군 기병은 무릎 아래까지 내려오는 사슬갑옷을 걸치고 투구는 노르만 헬멧을 쓰다가 나중에 양동이를 엎어놓은 듯한 모양의 헬름이라는 투구를 착용했다. 말을 타고 있을 때는 창을, 말에서 내려 싸울 때는 70-80cm 길이의 검을 사용했다.

 말까지 중무장한 십자군의 유럽 기병은 강력한 무장을 자랑했다. 아랍인들이 제대로 대항할 수 없었고 그들의 활은 십자군에 큰 피해를 주지 못했다. 제1차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점령한 것도 우수한 기병 덕분이었다.

 유럽에서 정통 중장기병이 일찍 나타나지 못한 이유는 그에 걸맞는 제철기술이 없었기 때문이다. 유럽의 제철 기술은 동양에 비해 낙후했다. 그들은 오랫동안 히타이트에서 개발된 방법으로 철을 만들었으며 철을 완전히 녹여 강철을 생산하는 방식은 14-15세기에 독일에서 처음 시작되었다. 이후 중세 시대의 기사들은 이렇게 만든 강철 갑옷으로 무장했다.

 게다가 중장기병으로 무장하려면 비용이 많이 든다. 중장기병의 경우 보병보다 2-4배의 비용이 든다. 그리스의 중장기병은 주로 귀족들로 구성된 전형적인 엘리트 병종으로 추정되며 그 병력의 수가 많지 않았다. 페르시아는 중장기병으로 무장할 저력은 충분했지만 보병과 궁수를 선호했기 때문에 중장기병을 크게 육성하지 않았다.

 최강의 고구려를 이끈 개마무사가 어디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일까? 학자들은 동천왕의 철기병을 근거로 보면 적어도 3세기 중반부터 고구려에 개마무사가 출현했다고 보여지며 전연에서 '동수'와 같은 인물이 망명하면서 무기는 물론 그 제작 기술도 함께 전래되었을 것으로 추정했다.

 서기 200년 조조와 원소가 대결한 관도 전투 당시 원소군에는 개마 300필, 조조군에는 10필이 있었다는 기록이 전한다. 이 때의 개마는 상류 계층의 신분 과시용이거나 호위대에서 제한적으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 규모는 크지 않았지만 중국의 개마무사가 후한 말경에 처음으로 등장한 것으로 볼 수 있다. 4세기 이후 중국에서는 개마무사가 대대적으로 등장한다. 고구려의 개마무사와 중국의 개마무사가 거의 동일하므로 학자들은 이들이 각 나라에서 독자적으로 발전했다기보다는 중국에서 고구려로 전래되었다고 본다.

 반면 고구려의 개마무사가 중국에서 전래되었다는 직접적인 증거는 없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중국에서 개마무사가 출현한 것이 대략 3세기 초이고 고구려도 동천왕 대가 3세기 중반이기는 하지만 그 규모에서 상당한 차이가 있다. 최초로 등장하는 기록만으로는 선후 관계가 분명하지 않다는 것이다. 또한, 4세기 이후에 선비족과 중국이 개마무사로 무장했다고 해서 이들이 고구려에 개마무사를 전래했을 것이라는 주장은 논란의 여지가 있다.


참고자료 : 한국 7대 불가사의(2007년, 이종호 저, 역사의아침, p162-2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