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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불가사의

훈제국과 한민족의 관계

훈제국과 한민족의 관계

 서양사에서는 훈(Hun)족이 375년 게르만족을 공격함으로써 게르만족 대이동을 촉발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훈족의 침입으로 자신이 살고 있던 근거지에서 쫓겨난 게르만족이 로마제국의 영내로 밀려들어가게 되고 476년 게르만족인 오도아케르에 의해 서로마제국이 멸망함으로써 유럽의 중세가 시작된다.

 4세기 유럽에 모습을 드러낸 훈족은 유럽인에게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서양사에서 강한 인상을 주는 게르만족조차 전투력 면에서 훈족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압도적인 전력을 바탕으로 훈족은 동로마를 압박하여 동로마에서 조공을 받는 위치가 되었다. 훈족은 중앙아시아를 호령하던 흉노가 서천하면서 불린 이름이다.

훈제국(훈제국 - 455년경)

 훈족의 지배자 중에서도 아틸라(395-453년)는 훈족의 전성기를 이끈 왕으로서 세계 3대 제국 중 하나를 건설한 영웅이었다(나머지 두 제국은 칭기스칸과 알렉산더 대왕이 세웠다). 아틸라는 유목민으로 프랑스까지 유럽을 점령한 당대 유럽 세계의 패자였다.

# 훈족의 원류는 한민족인가?

 자유베를린방송사 편집장 출신으로 텔레비전 다큐멘터리 작가이자 연출가인 옌스 페터 베렌트와 미국 코넬 대학과 베를린 공과대학 교수였던 아이케 슈미츠 박사는 독일 ZDF 방송이 제작한 다큐멘터리 시리즈에서 훈족을 집중 취재하였다.

 그들은 훈족의 서방 이동 경로에서 발견된 유물과 한국의 가야와 신라 지역에서 발견된 유물 등을 비교 검토한 후 다소 설명이 빈약하기는 하지만 훈족의 원류가 한민족일 가능성이 있다고 발표했다. 베렌트와 슈미트 박사는 한민족과 훈족이 연계되는 근거로 다음의 몇가지를 제시했다.

- 훈족의 이동경로에서 발견되는 동복(청동 솥)이 가야 지방에서 출토되었다. 동복은 유목 부족장들에게 바쳐진 것으로 정화 의식을 행할 때 고기를 삶는 데 쓰던 대형 화분 형태의 동제 용기이다. 동복은 유목민들의 상징적인 유물로 간주된다. 흉노식 동복이 김해가야 고분인 대성동 유적에서도 발견되었다. 이 동복은 남한에서는 백제, 신라 지역에서는 발굴되지 않고 김해에서만 3점이 발견되었다.

기마인물형토기(기마인물형토기 - 출처 : 국립중앙박물관)

- 훈족은 동복을 말 등에 싣고 다녔는데 신라에서도 말에 동복을 싣고 있는 기마인물상이 발견되었다. 경주 노동동 금령총에서 출토된 기마인물형토기 등 신라시대 점토상 2점도 동복을 말 엉덩이에 싣고 있다. 말에 탄 사람의 등에 끈으로 연결되어 있는데 인물의 복장과 삼각모가 전형적인 유목민의 차림이고 안장과 등자도 훈족이 사용하던 유물과 똑같다고 주장했다.

- 동복의 문양을 한국의 머리 장식에서도 흔히 볼 수 있다(금관의 문양과 유사하다). 훈족이 사용한 동복의 아가리에는 도형화된 나뭇잎이 섬세하게 세공되어 있으며 훈족 귀족 부인의 장식 머리띠와 관에도 비슷한 장식이 보인다. 한국에서 발견되는 금관의 경우 나무 형상과 녹각 형상이 주요 부분을 이루고 있다. 직각 수지형 입식은 신라지역에서만 나타나는 형태인데 훈족의 동복에도 같은 형태의 문양이 보인다.

- 훈족은 특이한 활(복합궁)과 화살을 사용했다. 당시 유럽인이 사용한 활과는 전혀 다른 훈족의 활은 우리 선조인 동이족이 사용하던 복합궁과 일치한다. 이탈리아 아퀼레이아에 있는 크리프타 아프레시 교회의 프레스코화에서 볼 수 있는 훈족의 활은 고구려 고분인 무용총의 벽화에서 말을 타고 사냥하는 무사들의 활과 똑같다.

- 훈족은 파르티안 기사법을 구사하였다. 파르티안 기사법은 달리는 말 등에서 몸을 돌려 뒤로 활을 쏘는 방식을 가리키는데 이는 북방 기마 민족의 전형적인 고급 기마술이다. 이 파르티안 기사법은 예부터 우리 민족에게도 익숙한 것으로 고구려의 무용총 벽화, 백제 금동 대향로의 기마 수렵 인물상, 경주 사정리에서 발굴된 신라 시대 문양전 등에서도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무용총 수렵도(무용총 수렵도 - 출처 : 위키백과)

- 훈족의 후예들에게는 몽골리안 반점이 있다. 프랑스 샹파뉴 인근에 있는 쿠르티솔 마을은 훈족이 갈리아 지방을 공격한 후 돌아가지 못한 채 정착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이 곳 주민들은 몽골리안 반점을 갖고 있다. 몽골리안 반점은 유전학적으로 몽골 계통 민족에 특히 한국 사람의 경우 85% 이상이 나타난다. 몽골리안 반점이 한국인에게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지만 큰 틀에서 한국인과 훈족 간에 친연관계가 있다고 볼 수 있다.

- 훈족은 편두를 갖고 있다. 인공적으로 외압을 가해서 두개골을 변형시킨 머리를 편두라고 하는데 일반적으로 유목민에게 많이 나타나는 풍습이다. 편두는 관자놀이와 이마가 눌려있고 머리통이 길게 늘어나 있는 특징이 있다. 학자들은 몽골에서 프랑스까지 훈족의 이동경로에서 발견된 무덤을 발굴하면서 훈족의 머리가 편두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고조선 지역에서도 일찍부터 편두 풍속이 있었다. 만주 지방에는 옛날부터 편두하는 습관이 있어 어릴 때부터 와구를 이용하여 머리통 모양을 인위적으로 편두형으로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다. 삼국지위지동이전에는 “아이가 태어나면 긴 돌로 머리를 눌러 납작하게 했다. 그래서 진한 사람들의 머리는 모두 편두다.”라는 기록이 있다. 여기서 진한은 3세기 중엽의 진한과 변한을 의미한다.

# 훈제국과 한민족의 관련성

 일반적으로는 훈족을 흉노로 보고 있는데 흉노가 동천하여 한반도로 내려왔을 가능성은 없을까? 여기에는 중국과 전투를 벌이는 와중에 하필이면 한반도 남부인 진한·변한 지역에 정착했느냐는 의문이 생긴다. 흉노의 본거지에서 진한·변한 지역으로 내려오는 길은 육로와 해로 모두 만만하지 않다. 이 지역으로 오려면 고구려와 백제를 거쳐야 하는데 불가능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흉노가 강성해진 것은 제철 기술을 익히고 강력한 기마군단을 철제 무기로 무장했기 때문이다. 진한·변한 지역에서는 철이 생산되는 지역이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북방 기마 민족이 힘들게 찾아온 이유가 될 수도 있다. 또, 고구려와 마한(백제) 지역은 상대적으로 강력한 국가가 존재했으므로 이들의 영향력이 비교적 미치지 않고 기반이 취약한 진한·변한 지역을 최종 목적지로 선택했다는 추론도 가능하다.

황금보검 보물635호(황금보검 - 출처 : 국립경주박물관)

 경주 미추왕릉지구 계림로 14호분에서 발견된 황금보검(보물 635호)은 기원전 6세기에 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전체 길이 36cm, 최대 폭 9.3cm이다. 황금보검에서 보이는 나선무늬는 통칭 그리스 소용돌이무늬라 일컫는 전형적인 그리스 로마 시대의 테두리 무늬로 그리스의 항아리 그림 등 연속 번개무늬에서 시작되었다고 추정한다. 번개 무늬가 점점 간략해져서 나선무늬로 변하고 누금세공 등의 테두리 무늬로 사용된 것이다.

 이 황금보검은 신라와 훈족의 지배자가 충분히 연계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아틸라의 근거지가 황금 보검의 고향이라고 볼 수 있는 트라키아 지역(현재 헝가리)이라는 점도 흥미롭다. 아틸라를 비롯한 훈족의 주력 세력이 한민족과 친연 관계에 있다면 동로마제국에서 만든 황금보검이 신라로 전해졌다는 추정도 가능하다.

 신라인은 여러 민족이 여러 시기에 걸쳐 혼합된 민족이다. 선사시대부터 살아온 토착 농경민들, 기원전 3세기경에 진나라의 학정을 피해 이민한 사람들, 기원전 2세기에 이주해 온 고조선의 유민들, 고구려에 멸망당한 낙랑에서 내려온 사람 등으로 구성된 민족의 토대 위에 북방 기마 민족인 흉노계까지 합류하였을지도 모른다.

 미국 디스커버리사에서 방영한 “아틸라의 훈”이라는 다큐멘터리에서는 훈족을 고구려인이라고 설명하기도 했다. 단정적으로 말할 수는 없지만 여러 증거들을 볼 때 훈족과 한민족 간에 어떠한 연결고리가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


참고자료 : 한국 7대 불가사의(2007년, 이종호 저, 역사의아침, p66-1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