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재에 덮인 폼페이(Pompei)
서기 79년 8월 24일, 나폴리로부터 12km떨어진 베수비오 화산 기슭에서 사루누스 강 어귀에 세워진 항구 도시 폼페이는 여느 때와 같은 아침을 맞이하고 있었다. 야채나 생선을 실은 짐마차가 거리에 돌아다니고 주민들도 하나둘씩 잠에서 깨어나 일을 시작했다. 도시는 활기에 차 있었다. 도시 한가운데에 있는 광장은 사람들로 붐볐다. 해마다 이맘때쯤 시장 선거가 있었기 때문에 시민들은 후보자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정오 무렵, 베수비오 화산으로부터 하늘을 뒤덮는 검은 연기가 솟아올랐다. 엄청난 폭발음과 함께 산꼭대기가 갈라지면서 뜨거운 화산재와 용암이 폼페이로 날아들었다. 빵을 구으며 점심식사를 준비하던 사람들은 놀라서 혼비백산하였다. 화산폭발은 며칠동안이나 계속되었다. 향락과 번영의 도시 폼페이는 그렇게 사라져갔다.
당시 폼페이는 농업과 상업의 중심지였을 뿐만 아니라 로마 귀족들의 피서지, 피한지로도 인기가 높았다. 매몰당시 폼페이의 인구는 2만~5만으로 추정되며(평균적으로 2만5천명으로 추정) 그 중 약 2000명이 사망하였다. 폭발이 갑작스러운 것이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전혀 갑작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8월 중순경부터 작은 규모의 지진이 계속하여 일어났으나 폼페이는 발전하고 있었으므로 걱정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오랫동안 잠들어 있던 폼페이는 우연히 세상에 다시 알려지게 되었다. 중세 말기 나폴리 왕이었던 샤를르는 이웃 나라의 공주 마리아 크리스티네를 왕비로 맞아들이기 위해 왕궁을 장식할 미술품을 모으고 있었다. 어느 날, 왕궁을 출입하는 상인이 근사한 큐피트 조각상을 가지고 찾아왔다. 정교한 조각상을 보고 마음이 흡족해진 왕은 그것을 어디서 구했는지 물어보았다. 상인은 며칠 전 베수비오 화산 기슭을 지나다가 땅에 박힌 무언가를 발견하였고 하인을 시켜 그것을 파보게 하였다. 그렇게 다른 파편들과 함께 큐피트 상을 발견한 것이라고 상인은 말하였다. 이때부터 폼페이 유적이 발굴되기 시작했다.
왕비가 된 크리스티네는 골동품에 관심이 많은 여자였다. 그녀는 왕실 공병부대 지휘관인 알쿠비에르를 시켜 베수비오 산기슭을 파헤쳤다. 이 발굴에서 청동 조각품 몇 개를 찾아냈고 '헤르쿨라네움 국장'이라고 새겨진 돌을 발견했다. 그들은 화산폭발 당시 용암에 파묻혔던 헤르쿨라네움(폼페이 근처에 있던 로마 제국의 도시)을 찾아낸 것이었다.
1748년 4월 1일, 왕의 명령을 받은 알쿠비에르는 또다시 산기슭을 파헤치기 시작했다. 4월 6일에 돌기둥을 발굴했는데 거기에는 라틴어가 새겨져 있었다. 더 깊이 파 들어가자 눈부신 프레스코 벽화가 그려진 건물 벽의 잔해가 나왔다. 4월 19일, 청동제 조각과 대리석 조각이 쏟아져 나오던 끝에 사람의 화석이 발굴되었다. 금화를 잔뜩 움켜쥔 남자가 석고처럼 단단하게 굳어 있었다. 이 사건으로 나폴리 왕국은 떠들썩해졌고 출토된 보물들은 빠짐없이 국왕에게 바쳐졌다. 얼마 뒤 원형극장을 발굴한 알쿠비에르는 기대했던 보물이 나오지 않자 발굴에서 손을 떼게 되었다. 1754년 이 곳에 대한 발굴이 다시 시작되었다. 샤를르 국왕은 그저 보물찾기에 혈안이 되어 이곳저곳 파헤치기만 했다.
1755년 6월, 독일의 고고학자 요한 빙켈만은 자기 집 서재에서 옛 로마시대 책들을 뒤적이고 있었다. 소(小) 프리니우스의 "서간집"을 읽어 내려가던 빙켈만은 흥분하기 시작했다. 그는 나폴리 국왕이 오래 전부터 파헤치고 있던 곳이 바로 폼페이라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발굴현장을 찾아간 빙켈만은 어처구니없는 모습에 크게 놀랐다. 일꾼들은 아무 곳이나 무턱대고 파 들어가 귀중품이 나오면 슬쩍 호주머니에 넣기도 하였으며 건축물은 마구 부순 뒤 유물만 파내고 건물을 묻어 버렸다.
빙켈만은 나폴리로 달려가 국왕을 만났다. 그리고는 유적과 유물을 훼손하지 말고 발굴하여 줄 것을 간청하였다. 왕은 벌컥 화를 내며 그를 내쫓았다. 게다가 다시는 발굴현장으로 가지 못하도록 감시당했다. 그는 나폴리 박물관에 있는 출토품을 스케치하는 일조차 거절당했다.
그러나 빙켈만은 현장 감독에게 돈을 주고 몰래 발굴 현장을 살펴보았다. 그렇게 어렵게 얻은 지식을 가지고 그는 1762년 '헤르쿨라네움 발굴에 관하여'라는 책을 출판했으며 1764년에는 '고대 미술사'라는 길이 남을 책을 펴냈다. 이 두 책은 폼페이와 헤르쿨라네움에서 나온 유물들을 처음으로 과학적이고도 올바르게 평가함으로써 로마 미술사라는 학문 체계를 세웠다.
1768년 6월 8일, 빙켈만은 이탈리아의 트리에스테에서 한 이탈리아인에게 살해되었다. 그의 죽음이 나폴리 국왕의 미움을 산 것 때문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범인이 살해 동기가 전혀 없다는 점이 그런 추측을 낳게 한다.
빙켈만이 죽은지 거의 100년이 다 되었을 때, 로마 대학의 피오렐리는 폼페이 유적에 남다른 관심을 보였다. 그는 이탈리아에 널리 퍼져 있는 고문서를 찾아 연구하던 가운데 누군가 직접 손으로 쓴 기록을 발견하게 되었다. 거기에는 이렇게 써 있었다.
'디토우스 대제가 즉위한 서기 79년 8월 24일, 베수비오 화산에서 대분화가 일어났다. 거대한 버섯과 같은 불기둥과 연기가 솟아올랐고 순식간에 산봉우리의 절반이 완전히 날아갔다. 뜨거운 용암이 흘러 내려와 산기슭에 위치한 폼페이와 엘코라노는 순식간에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피오렐리는 흥분했다. 좀 더 자료를 찾는다면 폼페이의 위치를 어렴풋하게나마 알아낼 수 있을 것 같았다. 피오렐리는 이탈리아의 도서관을 전부 뒤져 기록을 검토했다. 그리고 폼페이는 베수비오 화산 기슭에서 서남쪽으로 6km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했을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피오렐리는 정부의 도움을 요청했지만 정부 관계자는 시큰둥한 반응을 보일 뿐이었다. 피오렐리의 끈질긴 설득 끝에 이탈리아 정부가 거액의 예산과 인원을 지원하기로 하고 본격적인 발굴이 시작되었다. 5천명을 수용할 수 있는 원형극장의 일부가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무너진 저택의 문과 아름다운 조각상, 바둑판처럼 닦아 놓은 도로가 사람들의 눈을 의심하게 할 정도였다.
발굴은 계획대로 진행되었다. 피오렐리는 밤마다 그 날 하루의 일들을 기록하였다. 발굴이 계속되면서 피오렐리는 의문이 하나 생겼다. 사람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점이었다. 폼페이는 분명히 거대한 규모의 도시였으며 최소한 3만명 가량의 사람들이 살고 있었으리라고 추측할 수 있었다. 그런데 몇 구의 화석을 제외하곤 사체가 거의 나오지 않았다. 나머지 사람들은 어디로 간 것일까? 피오렐리는 당시의 심정을 일기장에 기록하고 있었다.
발견된 주택의 식탁에는 점심 식사 때 차린 그릇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모든 주민이 무사히 빠져 나갔다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었다. 한참을 고심하던 피오렐리의 머리 속에 문득 스쳐 지나가는 생각이 있었다. 그는 서둘러 발굴현장으로 달려갔다. 발굴 현장의 흙은 용암과 화산재가 식어서 굳어진 것이기 때문에 군데군데 구멍이 나 있었다. 그는 조수들을 시켜 그 구멍에 석고를 부었다. 석고가 식어서 굳은 다음, 그 주위의 흙을 긁어냈다. 그리고 부서진 용암 속에서 나타난 석고 덩어리는 본 사람들은 순간 비명을 질렀다. 그것은 사람의 모습이었던 것이다. 뜨거운 용암을 뒤집어 쓴 사람들의 육체는 전부 녹아 버리고 그 형태만 남아 용암 속에 빈 공간으로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피오렐리의 천재성으로 폼페이는 세월의 벽을 넘어 우리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대(大) 프리니우스(서기 23-79년, <자연지>의 저자이자 제독이었다)도 화산 폭발의 희생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당시 대 프리니우스는 폼페이에서 20km 떨어진 미세눔에 조카 소(小) 프리니우스(서기 61-114년, 정치가이자 <서간집>의 저자)와 함께 살고 있었다. 미세눔은 당시 이탈리아 함대의 정박지였다. 베수비오 화산이 폭발하자 로마 제국의 미세눔 해군 사령관이었던 대 프리니우스는 함대에 출동 명령을 내렸다. 폼페이의 바닷가로 가서 탈출한 시민들을 구하기 위해서였다.
해안가에서 사람들을 구조하고 있었을 때 바람이 낮게 깔리며 바닷가로 불어닥쳤다. 뜨거운 불기운과 독가스가 순식간에 함대를 덮쳤다. 구조작업을 하던 대 프리니우스와 로마 병사들 그리고 막 구조됐던 폼페이 시민들은 독가스에 질식해 숨지고 말았다. 소 프리니우스와 몇몇 병사만이 간신히 그 곳을 벗어날 수 있었다. 당시 열여덟 살이었던 소 프리니우스는 로마에 사는 숙부의 친구인 역사가 타키투스에게 화산 폭발의 상황을 편지로 자세하게 알렸다. 그 기록이 바로 위에서 말한 "소 프리니우스의 서간집"이다.
발굴된 폼페이는 약 3km둘레의 타원형 도시이다. 도시 전체를 성벽으로 둘러쌌으며 성문은 모두 8개, 길은 바둑판처럼 곧게 뻗어 구획정리가 잘된 모습이다. 길은 7m너비로 모두 돌로 포장되었고 인도가 양 옆으로 나 있다. 길모퉁이마다 공동 수도시설이 있어 집집마다 수돗물을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공중목욕탕이 3곳이 있었으며 도시 중앙의 광장 주변에는 시청, 공회당, 신전, 시장, 투표장 등 모든 공공시설이 갖추어져 있다. 상가나 공장, 주택 외에도 12,000명의 관중을 수용할 수 있는 대극장과 가장 인기있었던 검술 시합을 하는 원형경기장이 남아 있어 당시 사람들의 높은 생활 수준을 파악할 수 있다.
참고 자료 : 풀리지 않는 세계사 미스터리1(1995년, 민융기/편저, 하늘출판사, 184-)
폼페이 - 최후의 날(1995년, 로베르 에티엔 저, 주명철 역, 시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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