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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대 불가사의

[7대 불가사의] 에페소스(Ephesus)의 아르테미스(Artemis) 신전

[7대 불가사의] 에페소스(Ephesus)의 아르테미스(Artemis) 신전

  에페소스 시는 소아시아에 있는 고대 이오니아 지방의 12개 도시 중 하나로 기원전 6세기 경에 이미 서아시아에서 상업의 요충지로 번영하여 가장 부유한 도시로 알려졌다. 이 곳에는 처녀의 정절, 다산과 풍요를 가져다 주는 여신인 아르테미스를 모시기 위한 신전이 있다. 에페소스 인들은 범국민적으로 이 신전을 건설하고 복원과 유지를 해 왔다.

 아르테미스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여신으로 제우스와 레토의 딸이며, 아폴론과는 쌍둥이 남매지간이다. 신화에 의하면 아르테미스는 산에서 사슴을 쫓는 활의 명수라고 하며, 처녀들의 수호신이라고 한다. 아르테미스는 달의 여신이자 대지의 모신으로써 다산과 번성을 주관하는 신이다. 또한 순결과 정절의 상징이었는데 오리온과 악타이온은 처녀의 순결에 상처를 입힘으로써 죽음의 벌을 받게 되었다. 더욱이 악타이온은 아르테미스가 목욕하는 모습을 우연히 보았다가 개에게 갈기갈기 찢겨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그녀는 에페소스뿐만 아니라 소아시아, 그리스 그리고 로마에서도 숭배되었던 신이다. 로마 신화에서는 디아나(Diana)와 동일시되고 있다. 소아시아의 에페소스에서 신앙되던 아르테미스의 상은 풍부함을 나타내듯 살쪄 있고 허리 위까지 많은 젖가슴을 가지고 있다. 그 주변에는 기묘한 모습의 동물들이 얽혀져 있다. 그리고 다리는 미라를 싸는 천으로 휘감겨져 있는데, 이는 동서양 문화의 혼합으로 생각할 수 있다.

에페소스(Ephesus)의 아르테미스(Artemis) 신전(아르테미스 신전 모형 - ⓒ Zee Prime at cs.wikipedia)

 아르테미스 신전은 당시 최고의 부자였던 리디아 왕 크로이소스 때 세우기 시작하였다. 기원전 6세기 중엽의 일이었다. 높이 20m의 이오니아풍 백색 대리석 기둥이 127개나 사용되었다. 이 신전이 완성될 때까지 120년이나 걸렸다고 한다.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투스가 이 곳을 방문한 후 세계적인 걸작에 전혀 손색이 없는 위대한 건축물로 높이 평가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기원전 356년, 악행을 저지르려면 후세에까지 알려질 수 있는 악행을 저질러야 한다는 헤로스트라투스라는 자의 어처구니 없는 생각에 의해 계획적으로 신전은 불태워졌다. 신전이 불타 버린 후, 디노크라테스가 신전을 재건하기 시작했는데, 이 때 에페소스의 여인들은 자금마련을 위해 보석을 팔았고, 왕들은 크로이소스 왕을 본받아 기둥을 기증하기도 했다. 게다가 아시아 원정을 가던 알렉산더 대왕은 한창 건설 중에 있던 이 신전에 마음을 빼앗겨 자신의 이름으로 신전을 세워준다면 모든 비용을 대겠다고 제의하였다. 그러나 에페소스 인들은 다른 나라의 신을 모시는 신전을 세우는 것은 옳지 않다며 거절했다고 한다.

 야심이 강한 에페소스인들은 자신들의 신전을 지금까지의 어느 신전에도 뒤지지 않는 훌륭한 것으로 만들고자 했다. 당시 가장 훌륭했던 아테네의 파르테논 신전보다 더 큰 신전을 만들기로 결심했다. 파르테논 신전은 길이 69m, 폭 30m, 높이 10m에 58개의 대리석 기둥을 사용하였다. 에페소스인들은 아르테미스 신전을 파르테논 신전의 두 배 정도의 규모로 만들기 시작했다. 높이 18m짜리 기둥을 127개 사용하였고, 길이 120m, 폭 60m로 만들었다. 또한 신전의 건축용 자재는 가장 순도 높은 백색 대리석만을 사용했으며 중앙의 넓은 홀에는 네 방향으로 대리석 계단을 딛고 올라갈 수 있게 되어 있다. 신전이 완성된 기원전 250년경에는 신전의 규모나 화려함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당시 에페소스 시는 아르테미스 신전과 더불어 시가지의 건축물들이 대부분 대리석으로 만들어져 관광 명소가 되었다. 에페소스의 항구에는 관광객을 태운 배들과 교역 상인들로 넘쳐 났다.

파르테논 신전(파르테논 신전 - 출처 : Pixabay)

 아르테미스 신전은 최후의 피난처로도 유명하다. 페르시아인들이 도시를 공격하자 주민들은 신전으로 달려갔다. 그들이 신전의 기둥에 자신을 매고 '성역이다'라고 외치기만 하면 모두 구원될 수 있었다. 페르시아인들도 이 여신을 존경하여 신전 안에 있는 어떠한 사람도 해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범인이나 탈주자는 물론 왕위에서 쫓겨난 사람들에게도 신전은 합법적인 망명의 장소였다. 신전의 모든 땅은 신성하게 여겨졌으므로 동물과 물고기, 새들도 같은 대우를 받았다. 고대의 아르테미스 신전은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물들에게 최후의 구난처였던 것이다.

 소아시아에서 대형 건물을 건축하는 데 있어서 가장 큰 문제점은 지진이 자주 발생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신전이 건설될 장소를 신중하게 선정했지만 에페소스 지역은 원래 연약한 지반을 갖고 있는 곳이므로 안전한 장소를 찾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차선책으로 당시로서는 가장 안전한 건축 방법을 강구해야 했다. 에페소스인들은 신전을 습지 위에 건설하는 묘수를 생각해냈다. 그들은 우선 두터운 숯으로 된 층을 쌓고 그 위에 면으로 된 털을 많이 깔았다. 지진에 강력하게 저항하는 것보다 갈대가 바람에 흔들리는 것처럼 유연성을 주는 것이 더 안전하다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

 그런데 에페소스에 기독교의 물결이 밀려 왔다. 우상 숭배를 금했던 기독교인들에게는 신전 주변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자신들의 교리에 어긋나는 것이었다. 기독교인들은 우상숭배를 하지 말 것을 권유하면서 에페소스 인들과의 충돌을 빚었다. 기독교와의 충돌에서도 에페소스 인들은 신전에 대한 믿음을 버리지 않았다. 서로간의 문화가 마찰을 일으켰으나 신전은 건재했고 기독교는 계속 소아시아와 유럽으로 전파되어 갔다.

 아르테미스 신전은 260~268년 유럽에서 아시아로 이동해온 고트인들에 의해 약탈되고 방화되어 완전히 파괴되고 말았다. 신전의 부서진 지붕이나 기둥들은 건축자재로 쓰여지게 되어 신전이 있던 곳은 폐허가 되었다. 그 위로 먼지와 흙이 쌓이고 마침내 땅 속 깊이 묻히고 잡초가 덮혀 신전의 모습은 사라지게 되었다.

 후에 영국의 고고학자 I. T. 와트가 그리스의 철학자, 지리학자의 저서를 읽고 아르테미스 신전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1863년, 그는 대영 박물관의 원조와 11년간의 노력 끝에 지하 7m지점에 묻혀 있던 신전을 발굴해 냈다. 발굴한 건축용 석재와 기둥, 조각을 토대로 예술가들은 꽤 정확하게 신전의 본래 모습을 복원시켰다.

 아르테미스 신전의 중앙 부분에서 발견된 유물들은 발굴 팀을 다시 한번 놀라게 한다. 이 유물들은 크로이소스 왕보다도 훨씬 오래된 시대의 층에서 발견되었다. 이들의 발굴로 이제까지 아르테미스 신전에 관한 모든 기록을 다시 쓰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에페소스에서 건립된 첫 번째 아르테미스 신전은 기원전 850년경에 건설된 것으로 추정됐다. 이 건물은 홍수와 화재에 의해서 완전히 파괴되었는데 크로이소스 왕이 파괴된 신전의 자리에 두 번째 신전을 세웠고 이 신전도 파괴되자 알렉산더 대왕 시대에 세 번째 신전이 같은 장소에 지어졌다는 것이다.

 이제는 소수의 주민들이 살고 있는 에페소스는 늪지대로 변했다. 화려했던 과거를 뒤로 한 채, 에페소스는 아르테미스 신전과 운명을 함께 했는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