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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대 불가사의

[7대 불가사의] 핼리카나소스의 마우솔러스 영묘, 마우솔레움

[7대 불가사의] 핼리카나소스(Halicarnassus)의 마우솔레움(Mausoleum)

 기원전 377년, 핼리카나소스 시는 소아시아의 지중해 연안에 존재하는 작은 왕국의 수도였다. 이 나라의 통치자였던 헤카톰너스(Hecatomnus)가 죽고 왕국의 통치권은 그의 아들 마우솔로스(Mausolus)에게 넘어갔다. 페르시아의 지방 총독이었던 헤카톰너스는 야심 찬 통치자였으며, 주변의 몇몇 도시와 지역의 통치권을 장악하였다. 마우솔로스 시대에 영토는 더욱 확장되어 마침내 소아시아의 남서쪽 대부분을 포함하기에 이르렀다.

 마우솔로스와 그의 왕비 아르테미시아(Artemisia)는 핼리카나소스와 주변 영토를 24년간 통치하였다. 비록 마우솔로스는 지방 사람의 자손이었으나 그리스어를 사용하고 그리스 정부와 생활 방식을 동경하였다. 그는 해안을 따라 그리스식의 많은 도시를 세웠으며 그리스의 민주주의 제도를 장려하였다.

핼리카나소스(Halicarnassus)의 마우솔레움(Mausoleum)

 기원전 353년 마우솔로스가 죽자, 그의 누이이자 왕비인 아르테미시아는 비탄에 잠겼다(자신의 누이와 결혼하는 것은 카리아(Caria)지역 통치자들의 풍습이다). 그에게 바치는 선물로써 그녀는 세상에서 가장 화려한 무덤을 만들기로 결심했다. 마우솔로스의 이름을 본따 만든 무덤은 "마우솔레움(Mausoleum)"이라고 하는 꽤 유명한 구조물이다. 이 건물의 크기는 면적 29 X 35.6m, 높이 50m이고, 아름답고 특이한 모양과 복잡한 장식 때문에 세계 7대 불가사의의 하나로 꼽힌다. 이 무덤의 영향으로 헬레닉과 로마 시대를 거쳐 현재에도 거대한 장례 건축물을 "마우솔레움"이라고 부른다.

 아르테미시아는 그 무덤 건축에 아낌없는 비용을 지불할 것이라 결심했다. 그녀는 당시의 가장 유능한 예술가를 찾기 위해 그리스로 사신을 보냈다. 거기에는 에페수스의 아르테미스 신전의 재건축을 감독했던 스코파스(Scopas)가 포함되었다. 무덤의 설계는 사티로스와 피테오스가 맡았으며, 수백명의 기술자와 브리아크시스(Bryaxis), 레오카레스(Leochares), 티모시우스(Timotheus)같은 유명한 조각가가 스코파스와 합류하였다.

 그 무덤은 도시를 내려다보는 언덕에 세워졌다. 모든 건물들이 안뜰을 둘러싸서 세워졌다. 안뜰의 가운데에는 무덤 위에 평평한 석대를 놓았다. 계단과 측면의 돌사자가 이 단의 꼭대기로 인도한다. 이것의 바깥 벽을 따라 많은 신과 여신들의 상이 그려져 있다. 각각의 모서리에는 무덤을 지키는 말 탄 전사들이 있다.

 단의 중앙에는 무덤만이 놓여 있다. 대부분이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이 구조물은 가는 블록으로 정사각형 모양으로 마우솔레움 높이의 1/3만큼 쌓아 올렸다. 무덤의 이 부분은 그리스 신화의 유명한 이야기의 조각으로 덮여 있다. 켄타우르스(Centaurs)와 라피스(Lapiths)의 전투장면도 있고, 여전사 종족인 아마존과 그리스의 전쟁 모습도 묘사되어 있다.

 무덤의 이 부분 위에는 36개의 가는 기둥이 각 면마다 9개씩 무덤의 1/3높이만큼 솟아있다. 기둥 사이에 각각 다른 조각상이 서 있다. 기둥 위에 무덤의 육중한 지붕 무게를 지탱하는 단단한 블록이 있다.

 무덤의 나머지 1/3은 지붕으로 피라미드 형태로 되어 있다. 지붕 꼭대기에 늠름한 말 네 마리가 마우솔로스와 아르테미시아를 태운 2륜 전차를 끌고 있는 모습의 조각이 놓여 있다.

 무덤의 건축이 시작된 직후 그녀에게는 위기가 찾아왔다. 에게 해와 그리스, 소아시아 사이에 있는 로도스 섬은 마우솔로스에 의해 정복된 곳이었다. 그의 죽음 소식을 들은 로도스인들이 반란을 일으켰고, 핼리카나소스를 점령하기 위해 함대를 보냈다. 로도스 함대의 진격 소식을 듣고 아르테미시아는 배를 타고 도시의 항구 동쪽 끝에 있는 비밀 장소로 피신했다. 로도스 함대가 상륙하여 공격할 때 아르테미시아 함대는 습격을 했고, 로도스 함대를 사로잡아 바다 밖으로 끌어 냈다.

마우솔러스, 아르테미시아마우솔러스와 아르테미시아

 아르테미시아는 습격한 배에 그들의 병사를 태워 로도스로 보냈다. 자신들의 승리한 군대가 돌아온 줄로만 알았던 로도스인들은 방어에 실패했고, 반란은 쉽게 진압되었다.

 아르테미시아는 자신의 남편이 죽은 뒤 2년 밖에 살지 못했다. 아직 완성되지 않은 무덤에 같이 묻히고 싶어했다. 기술자들은 그들의 후원자가 죽은 후에도 남아서 고인의 명성과 조각예술을 위한 기념비적인 공사를 끝내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마우솔레움은 수세기 동안 핼리카나소스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기원전 334년에 알렉산더 대왕에게 도시가 함락될 때에도, 기원전 62년과 58년에 해적의 공격을 받았을 때도 손상되지 않았다. 그것은 도시가 폐허가 되기 전 17세기 동안 그 곳에 있었다. 연속된 지진으로 기둥은 산산조각 나고 돌로 만든 2륜 전차는 땅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1404년에는 단지 그 터만이 마우솔레움의 존재를 알 수 있게 해 주었다.

 13세기 이후 도시를 점령한 십자군 전사들은 부러진 돌들을 자신들의 건물을 짓는데 재사용하였다. 무덤에서 절단상태가 양호한 돌은 건축용 자재로 사용했고 손상이 심한 것은 몰타르를 만들어 사용하였다. 1522년 터키의 침입에 대한 소문은 십자군의 핼리카나소스의 성(Bodrum이라 알려진)을 더욱 견고하게 만들게 했고 무덤의 일부로 남아 있던 것을 부셔서 그들의 성벽에 이용했다. 게다가 무덤의 대리석으로 끝마무리한 부분이 아직까지 남아 있다.

 이 시기에 한 기사 일행이 기념물의 터에 들어갔고 큰 관을 포함한 방을 발견했다. 그들은 그 날은 해가 저물어 다음날 다시 무덤을 찾았다. 그 곳은 어떤 보물도 가지고 있지 않았으며, 모두 약탈되었다. 마우솔레움의 보물은 그동안 터키인들이 약탈했다는 것이 정설로 믿어졌었다. 그러나 마우솔레움의 보물들은 약삭빠른 기독교인들에게 약탈당한 것이었다. 약탈은 그 성에 있었던 수도사들에 의해 저질러진 것으로 보인다. 혹자는 십자군 기사들이 무덤을 약탈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핼리카나소스(Halicarnassus)의 마우솔레움(Mausoleum)

 마우솔레움의 남아있던 조각에 석회칠을 하기 전에 기사들은 몇몇의 좋은 조각을 떼어내서 보드룸(Bodrum)성에 끼워 박았다. 그것은 3세기 동안 그 곳에 있었다. 그 때 영국의 대사가 그 조각상을 성으로부터 몇 개 가져와 현재 대영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1846년 박물관은 고고학자 찰스 토마스 뉴턴에게 더 많은 마우솔레움의 유물을 찾아오라고 보냈다. 그 작업은 쉽지 않았다. 그는 무덤의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었고 탐색을 위한 땅의 일부를 사는 데 드는 비용이 천문학적이었다. 대신에 뉴턴은 기념물의 위치와 크기에 접근하는 글들을 연구하였고 무덤이 있던 곳으로 거의 확실시되는 땅을 샀다. 그는 땅 밑에 터널을 파고 그 주변을 탐색했다. 그는 몇몇의 벽과 계단 그리고 기초의 세 모서리를 찾아냈다.

 뉴턴은 그 곳을 계속 파내서 건물의 벽을 장식하고 지붕을 덮였던 유물의 일부를 발견하였다. 또한 지붕 위 조각이던 직경이 7피트가량인 부러진 2륜 전차의 바퀴를 발견했다. 마침내 그는 건물의 꼭대기에 서 있던 마우솔로스와 아르테미시아의 조각상을 찾아냈다.

 오늘날 이 예술품들은 대영 박물관의 마우솔레움 실에 보관되어 있다. 마우솔로스와 그의 왕비 조각상은 그녀가 그를 위해 만들었던 아름다운 무덤의 부서진 몇몇 유물들을 영원히 돌봐 줄 것이다.


참고 자료 : 신화와 역사로 읽는 세계 7대 불가사의(2001년, 이종호 저, 뜨인돌, 117-142)

http://www.unmuseum.org의 원문 번역 편집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