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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대 불가사의

[7대 불가사의] 로도스 항구의 크로이소스 거상, 콜로소스

[7대 불가사의] 로도스(Rhodoes) 항구의 콜로소스(Colossus)

  뉴욕항을 여행해 본 사람이라면 놀라운 광경을 보았을 것이다. 항구의 조그만 섬에 길고 헐렁한 옷차림의 여인이 책과 횃불을 들고 서 있는 모습을 말이다. 그 조각상은 발에서 왕관까지 거의 36m에 달한다. 이것은 때때로 "현대의 콜로소스"라고 언급되지만 대개 자유의 여신상이라 불린다.

 이 경외심을 불러일으키는 조각상은 프랑스가 미국에 선물한 것으로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다. 하지만 이 자유의 성지를 방문하는 사람들은 자유의 여신상이 다른 조각상을 모방한 것을 잘 모른다. 2000년전 번성한 항구였던 로도스 섬의 입구에는 콜로소스가 세워져 있었다. 자유의 여신상처럼 이 콜로소스도 자유의 경축을 위하여 세워졌다. 세계 7대 불가사의 중의 하나인 이 거상은 자유의 여신상과 같은 크기의 높이로 세워져 있었다.

로도스(Rhodoes) 항구의 콜로소스(Colossus)(로도스 거상 - 출처 : unmuseum.org)

 로도스 섬은 고대의 중요한 경제 중심지였다. 그것은 에게해와 지중해가 만나는 소아시아의 남서쪽 끝에 위치하고 있었다. 기원전 408년에 세워진 수도의 이름 또한 로도스였으며, 북쪽 연안의 섬은 최적의 자연항구라는 이점을 얻어 설계되었다.

 기원전 357년, 그 섬은 헬리카나소스의 마우솔로스에게 정복되었고, 기원전 340년에는 페르시아인에게 함락되었으며, 기원전 332년에 마지막으로 알렉산더 대왕에게 점령당했다. 알렉산더 대왕이 젊은 나이에 열병으로 죽자, 그의 부하장군들은 그의 거대한 왕국의 통치를 위해 서로 잔혹하게 싸웠다.

 로도스의 사람들은 이 싸움에서 프톨레마이오스(이집트를 지배한 왕)를 지지하였다. 이는 로도스를 차지하기 위해 자신의 아들 디메트리우스(Demetrius)를 보냈던 안티가우스(Antigous)를 화나게 했다.

 도시는 높고 강한 성벽에 의해 보호되었고, 공격측은 이를 넘기 위해 포위공격을 감행했다. 목조 성벽의 포위 공격에는 종종 투석기를 사용하였는데 병사들이 성벽을 기어오르기 위해 수비측 성벽 근처로 전진할 수 있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디메트리우스는 그의 공격을 위해 여섯 척의 배를 묶고 그 위에 설치한 큰 요새를 이용하였다. 그러나 이 요새는 갑자기 몰아친 폭풍으로 인해 부서지고 전복되었다. 이 전쟁은 로도스 사람들에 의해 승리하였다.

 디메트리우스는 두 번째 요새를 세워 공격해 왔다. 이것은 거의 145m의 높이와 23m2의 바닥을 가지고 있었다. 이것은 많은 투석기를 갖추었으며, 내부의 궁수부대를 보호하기 위해 나무와 가죽으로 표면을 덮었다. 이것은 화력전의 불화살에 견딜 수 있는 "물탱크"를 운반하였다. 이 요새는 쇠바퀴 위에 설치되었고 그 성벽에 다가갈 수 있었다.

 디메트리우스가 도시를 공격했을 때, 수비측은 성벽 바깥의 배수구를 범람시켜서 그 육중한 전투기계를 진흙 속에 빠뜨렸다. 거의 일 년이 지난 뒤 이집트의 원군인 해군 함대가 도착했다. 디메트리우스는 그 큰 요새를 남겨두고 서둘러 철수하였다.

자유의 여신상(자유의 여신상 - 출처 : Pixabay)

 그들의 승리와 자유를 경축하기 위해서 로도스 사람들은 그들의 수호신인 헬리오스(Helios)의 거대한 상을 세우기로 결정했다. 그들은 디메트리우스가 버리고 간 무기들로부터 필요한 청동을 녹여냈다. 콜로소스(Colossus)가 세워지고 몇 세기 후에 살았던 플리니(Pliny)라는 역사학자에 의하면 그 건축은 12년간 계속되었다고 한다. 다른 학자들은 기원전 304년에 그 작업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 상의 높이는 34m였으며, 항구의 방파제 근처에 15m의 받침대 위에 서 있었다. 그 상은 배가 밑으로 지나다닐 수 있도록 다리를 항구 입구에 매달아 놓았다고 흔히 묘사되었다. 그러나 실제로 그것은 전통적인 그리스 양식의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벌거벗은 누드, 삐죽삐죽한 왕관, 일출에 부시는 눈을 오른손으로 가리고 소매없는 망토를 왼손으로 잡은 모습 등이 그것이다.

 청동 거상은 바다를 응시하며 두 다리를 벌리고 서 있었는데 한쪽 다리는 단단한 땅 위에 다른 쪽 다리는 방파제 위에 올리고 있고 그 사이를 거대한 함선이 지나다녔다는 전설이 있다. 그러나 현대 학자들은 동상의 두 다리 사이로 배가 지나다니려면 최소한 거상의 높이가 120m는 되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게다가 고대의 어떠한 문헌에서도 그런 자세에 대한 언급이 없으며, 그리스인들이 그런 어색한 양식으로 그들의 신을 묘사했다는 것은 있을 법하지 않은 일이다. 게다가 그런 자세로 건설되는 동안 항구를 폐쇄하였음을 의미하는데, 경제적으로 봐도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로도스 섬의 거상이 그런 상상을 하게 할 만큼 사람들에게 큰 인상을 준 것만은 사실이다.

 이런 대형 청동상이 로도스 섬에만 존재했던 것은 아니다. 로도스의 거상이 건설될 즈음에 지중해 동부에는 거의 2만개의 청동으로 된 조상들이 있었다. 아테네, 올림피아와 델피에는 각가 약 3천개의 청동 조각상이 있다고 프린느는 적고 있다. 이들 청동 조상들은 비록 로도스 섬의 거상과 같이 규모가 크지는 않았지만 상당수가 큰 규모였다.

 그 상은 철골구조 위에 청동판으로 만들어 졌다. "Plion of Byzantium"이란 책에 의하면, 15톤의 청동과 9톤의 철이 사용되었는데, 이 수치는 적은 것처럼 보인다. 자유의 여신상은 같은 크기에 대략적으로 225톤의 무게가 나간다. 약한 물질에 의지하고 있는 콜로소스는 같거나 더 많은 무게가 나갔을 것이다.

 고대의 문헌에는 상의 안쪽에는 중추를 지지하는 몇몇의 석주(돌기둥)가 있었다고 적고 있다. 철빔을 그 돌에 몰아넣고 청동의 외부 표면을 연결하였다. 각각의 청동판은 상의 위치에 맞는 모양으로 주조된 주형을 조심스럽게 쳐 내고, 그 위치에 끌어올린 뒤 주위의 판들과 철구조에 대못으로 고정시켰다.

 이 거대한 건축의 설계자는 도시의 방어를 위해 싸웠던 애국자이자 로도스의 조각가인 린도스(로도스 섬 동쪽의 고대도시)의 카리오스(Chares)였다. 카리오스는 이전에 큰 규모의 상 제작에 관여한 적이 있다. 그의 스승인 Lysippus는 18m 높이의 제우스 상을 만들었다. 그는 표면 청동판 모양의 길잡이 역할에 사용된 0.9m 높이의 상의 변형을 만들면서 작업을 시작한 것 같다.

 카리오스는 그의 계획이 끝나는 것을 볼 때까지 살지 못했다. 그의 자살에는 몇가지 전설이 있다. 첫 번째는 상의 건설이 거의 끝나갈 무렵, 누군가가 그 건축의 조그만 결함을 지적하였고 이를 수치스럽게 여긴 그가 자살했다는 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시의 행정가들이 상의 높이를 두배로 할 것을 결정하였다는 것이다. 카리오스는 상의 높이가 2배가 되면 필요한 자재의 양이 8배가 된다는 사실을 망각했다. 이러한 명예 실추가 그를 죽음으로 내몰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전설이 사실이라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로도스의 거상은 어떤 방법으로 제작된 것일까? 일반적으로 청동거상을 만드는 방법은 서로 다른 재료를 사용하여 거상을 여러 조각으로 나누어 제작한 후 조립하는 방법이다. 또 하나는 규모가 다소 크더라도 한번에 주물하는 방법이 있고 마지막으로 주물을 한번에 부을 수 없을 정도로 큰 청동상이라면 몇 단계로 나누어 주물한 후 하나처럼 보이게 하는 방법이 있다.

 대부분의 학자들이 제시하는 로도스 거상의 제작 방법은 여러 단계로 나누어 주물하는 것이다. 먼저 1단계의 청동 주물이 완성되면 흙으로 토대를 만들고 다음 단계의 청동상을 만든다. 그것이 완성되면 그 높이까지 또다시 흙으로 토대를 만든다. 거상이 높아질수록 토대도 더 높이 쌓으면서 청동상을 완성시켰다는 것이다. 이 경우 조각가가 자신이 주물한 청동상의 형태를 알 수 없게 되는 단점이 생긴다.

 일부 학자들이 제기하는 방법은 청동상의 외형만 청동판으로 붙였다는 것이다. 플리니우스는 부서진 청동상 안에서 돌의 잔해를 볼 수 있었다고 하는데 이것은 청동상 전체를 주물로 하지 않고 어느 부분은 돌로 만든 다음 청동판을 붙였다는 가설을 뒷받침하는 증거이다. 특히 필론은 로도스의 거상을 만드는데 500탈란트의 동이 들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것은 겨우 10여톤의 청동이 사용되었다는 뜻이다. 바로 이 점이 로도스 거상을 제작했다면 당연히 존재해야 할 그 제작에 관한 흔적이 없다는 것을 설명한다는 주장도 된다.

 그러나 로도스의 거상은 고대로부터 청동으로 만들어졌다고 전해지며 또 수많은 목격자들이 청동상이라고 기술했다. 더구나 거상은 1년에 단지 2-2.5m정도 밖에 제작할 수 없었다는 기록과 거상을 만들기 위해 당시 전세계의 청동을 수집했음에도 청동을 구하기 힘들었다는 기록도 있다. 이것은 청동 거상을 청동판으로 매우 얇게 붙이지 않았다는 강력한 증거가 된다. 그러나 대부분의 학자들은 일부분이든 전체적이든 청동판을 붙였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 콜로소스는 약 56년 동안 항구 입구에 자랑스럽게 서 있었다. 매일 아침 태양은 연마된 청동 표면에 걸려 있었으며, 그 신상을 빛나게 만들었다. 그 후 기원전 224년경 지진이 로도스를 강타했고 그 상을 붕괴시켰다. 한 세기 동안 그 상의 큰 조각들이 항구를 따라 놓여 있었다.

 이집트의 왕이 그 거상의 재건설 비용을 지불하겠다고 제안하였으나 로도스인들은 거절하였다. 그들은 그 거상의 헬리오스 신을 화나게 하여 그가 지진을 일으켜 그것을 쓰러뜨렸다며 두려워했다.

 7세기에 아랍인들이 로도스를 정복했고, 그들은 부서진 채 서 있던 콜로소스의 남은 조각을 부셔 버렸으며, 그 금속을 긁어 모아 팔았다. 전설에 의하면 900마리 낙타분의 금속을 거상으로부터 실어 날랐다고 한다. 위엄있는 예술품의 슬픈 최후였다.


참고 자료 : 신화와 역사로 읽는 세계 7대 불가사의(2001년, 이종호 저, 뜨인돌, 145-164)

http://www.unmuseum.org의 원문 번역 편집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