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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터리 인물편

독가스를 만든 과학자, 프리츠 하버

 1915년 4월 22일,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던 벨기에 서북부 이프르(Ypres) 지역. 연합군 소속으로 이 지역을 지키고 있던 프랑스군 진영으로 뿌연 연기가 스며들었습니다. 연기 속에서 병사들은 목이 따갑고 눈이 점점 흐려졌습니다. 폐를 찌르는 듯한 고통을 느끼며 병사들은 쓰러져 갔습니다. 독가스를 사용한 독일군에 의해 5천여 명이 넘는 군인이 가스에 질식해 고통스럽게 죽어 갔습니다. 인류 역사상 최악의 생화학적으로 기록된 이프르 전투. 이 전투 이후에 연합군 측에서도 독가스를 발명해 전쟁에 동원하기 시작했습니다.

프리츠 하버(출처 : Wikimedia Commons)

 독일의 독가스를 개발한 사람은 프리츠 하버(Fritz Haber)라는 저명한 화학자였습니다. 그는 이 전투에서의 공로로 장교 직위와 함께 독일 최고의 과학 기관인 카이저 빌헬름 연구소의 총 책임자로 임명되었습니다. 프리츠는 1914년 독일 정부로부터 독가스 개발 프로젝트를 맡아달라는 제안을 받았고 이를 수락하였습니다. 소금을 전기분해하여 얻은 염소를 농축시킨 염소가스를 만들어 냈는데 이 염소가스는 적은 양으로도 인체를 마비시키고 장기를 손상시키는 강한 독성이 있었습니다.

 1918년 독일이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하면서 독가스를 개발한 프리츠는 자신이 전범으로 몰릴 수 있다는 두려움에 스위스로 망명을 가게 되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해 12월 프리츠는 스웨덴 왕립 학술원으로부터 노벨화학상 수상자로 선정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사실 독가스 개발을 맡기 전에 그를 유명하게 만든 것은 질소 비료였습니다. 1900년대 유럽 사회는 폭발적인 인구 증가에 따른 식량 부족에 시달렸고 농작물의 대량생산에 필요한 질소비료가 부족한 상황이었습니다. 이에 프리츠 하버와 그의 아내 클라라 임머바르(Clara Immerwahr) 부부는 공기 중의 질소를 이용해 질소비료를 만드는 기술을 연구하고 있었습니다.

출처 : Wikimedia Commons

 그런데 남편 프리츠가 과로에 영양실조까지 겹쳐 쓰러지자 클라라는 과학자로서의 자신의 꿈을 접고 남편 내조에 힘을 쏟게 됩니다. 1909년 3월, 프리츠는 공기의 78%를 차지하는 질소를 암모니아에 고정하는 합성법을 통해 질소비료를 대량생산하는 제조법을 개발하였습니다. 질소비료는 농작물 생산량을 6배 이상 증가시켜 식량문제를 일시에 해소하였습니다. 사람들은 프리츠를 ‘공기로 빵을 만든 과학자’라고 불렀습니다.

 클라라는 남편이 전쟁에 사용할 독가스를 개발하겠다고 했을 때 그를 강하게 비판하였습니다. 첫 독가스 공격인 이프르 전투를 승리로 이끌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클라라는 남편과 계속 다투었습니다. 프리츠가 러시아에 독가스 공격을 감행하기 위해 떠나는 5월 2일 아침 클라라는 남편의 권총으로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출처 : HistoryCollection.com

 독일의 패배로 전쟁이 끝난 후 프리츠에게도 시련이 찾아왔습니다. 1920년대 중반부터 부상한 나치는 유대인을 차별하기 시작했고 1933년 정권을 잡은 히틀러는 유대인에 대한 탄압을 본격화하기 시작했습니다.

 독일을 위해 평생을 일했지만 유대인이었던 프리츠는 이스라엘에 있는 과학 연구소의 소장직을 맡아달라는 요청을 받았습니다. 독일에서의 삶을 정리하고 이스라엘로 가는 도중 1934년 1월 19일 스위스의 한 호텔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하게 됩니다.

참고자료 : 서프라이즈 인물편(2016년, 신비한TV 서프라이즈 제작팀 저, MBC C&I, p94-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