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아의 방주(Noah's Ark)
하느님이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과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고 땅 위에 사람 지음을 한탄하면서 마음에 근심하고 홍수로 그들을 심판하려 하였다. 그리고 홀로 바르게 살고 있던 노아(Noah)에게 이르기를 "너는 잣나무로 너를 위하여 방주를 짓되 그 안에 칸들을 막고 역청으로 그 안팎에 칠하라. 그 방주의 제도는 이러하니 장이 300규빗, 광이 50규빗, 고가 30규빗이며 거기 창을 내되 위에서부터 1규빗에 내고 그 문은 옆으로 내고 상중하 3층으로 할지니라"고 계시를 내렸다.
그는 120년에 걸쳐 방주를 만들어 8명의 가족(노아와 그의 처, 세 아들과 며느리)과 모든 동물을 한 쌍씩 이끌고 방주로 들어가 1년 10일동안을 그 안에서 지내며 재앙을 피했다. 대홍수를 만나 모든 생물이 전멸하고 말았지만 이 방주에 탔던 노아의 가족과 동물들은 살아 남았다고 한다. 노아는 신앙의 모범, 방주는 교회, 대홍수는 하느님의 심판을 상징하며 원시 교회 이래 그리스도교 예술의 소재로 많이 다루어지고 있다.
노아는 아담의 10세손이고 라멕의 아들이다. 노아라는 말은 헤브라이 어로 '휴식'을 뜻한다. 창세기에는 부정하고 타락한 세상에서 가장 올바르고 완전한 사람이 노아라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노아는 신약과 구약 성서에서 자주 인용되고 있으며 포도를 재배하던 사람으로 기록되어 있다. 노아는 홍수 뒤 350년을 더 살다 950세에 죽었다. 홍수에서 살아 남은 노아의 세 아들 셈, 함, 야벳은 각지로 흩어져 세계 각 민족의 조상이 되었다.
방주는 통상적으로 말하는 배가 아니었다. 방주(Ark)라는 말의 어원은 커다란 상자를 뜻하는 라틴어 'arca'에서 왔다. 방주는 그저 물 위에 뜰 수 있는 상자 모양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해주는 대목이다. 많은 사학자들은 대홍수가 일어난 시기를 기원전 2900년에서 5500년 사이로 추정해 왔다.
구약성서 창세기의 내용과 똑같은 이야기가 등장하는 기록이 있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바빌로니아의 대서사시로 3천행에 이르는 길가메쉬 대서사시. 구약성서보다 더 오래 전에 기록된 이 시의 "수메르(Summer) 왕명표"에 따르면 길가메쉬는 홍수 후 수메르를 통치한 왕으로 기록되어 있다. 전설에 따르면 길가메쉬는 우트나피수팀(Utnapishtim)이라는 현자가 영생을 얻었다는 소문을 듣고 그를 만난다. 우트나피수팀은 자신이 대홍수 때 겪은 이야기를 들려 준다.
어느 날 밤, 우트나피수팀이 자고 있는데 에아 신이 그의 집 갈대벽을 뚫고 들어와서 조용히 경고했다. 바빌론의 최고의 신 엔릴이 타락한 인간을 응징하기 위해 대홍수를 일으킬 것이라는 말이었다. 그는 주민들에게 이 사실을 알렸으나 누구 하나도 상대하려 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그는 친족과 친구들의 힘으로 집을 부셔 사각형의 방주를 만들기 시작했다. 7일째 되는 날 갑판까지 6층이나 되는 거대한 배가 완성되었다. 그는 자기 가족과 하인들을 방주에 태우고 금과 은 그리고 모든 살아있는 것의 씨앗을 실었다.
드디어 6일 밤낮으로 비가 쏟아지고 인간들을 모두 죽음을 맞이했다. 그가 탄 방주는 니시르 산에 닿았다. 우트나피수팀은 땅에서 물이 빠졌는지 확인하기 위해 들창을 열고 비둘기와 참새, 큰 까마귀를 날려보냈다. 그런데 까마귀가 돌아오지 않자 홍수가 끝난 것을 알고 배에서 내려 제일 먼저 신들에게 제물을 바쳤다. 그는 홍수를 일으킨 신들을 원망하지 않고 도리어 공경하게 되자 이에 감명받은 신들은 그에게 영생을 선물하였다.
이 이야기는 고대 메소포타미아에서 일어난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기록이다. 그런데 이스라엘 민족은 원래 고대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살고 있던 셈 족의 일원이다. 또 구약성서는 기원전 12세기부터 기원전 2세기까지 약 1천년에 걸친 이스라엘 민족의 기록이다. 그렇다면 성경에 자신의 선조들이 겪은 이야기인 메소포타미아 신화가 삽입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문제는 세계 곳곳의 전설에 홍수 설화가 등장한다는 사실이다. 그리스 신화의 데우칼리온은 큰 상자 모양의 배를 만들어 대홍수를 피한다. 아일랜드의 옛 전설에도 이와 유사한 이야기가 있다. 이슬람 경전인 코란에서도 이러한 이야기를 볼 수 있으며 미시시피 지방과 캘리포니아, 알래스카 지역의 인디언들도 대홍수 전설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하와이에도 섬 전체가 물에 잠겼을 때 마나키아 산 위에서 살아남은 두 사람에 관한 두 편의 전설이 있다. 세계 각국의 이러한 전설은 고대에 홍수가 있었다는 가설에 상당한 힘을 실어주고 있다.
그렇다면 무엇이 이런 대홍수를 가능하게 했을까? 성경에 의하면 40일간 계속해서 비가 내렸다고 한다. 그러나 대기 중에 존재하는 전체 수증기가 모두 한꺼번에 땅 위에 쏟아진다고 가정해도 결과는 단 1인치의 해수면 상승이 일어날 뿐이다. 일부 학자들은 혜성이나 소행성이 지구에 충돌해서 엄청난 양의 홍수와 파도가 지구를 휩쓸었다고 주장하지만 어떤 증거도 남아있지 않다.
대홍수와 관련해서 콜럼비아 대학교의 윌리엄 라이언과 월터 피트만 두 교수의 흥미로운 주장이 있다. 빙하기가 끝날 무렵, 빙하가 녹으면서 북반구의 해수면이 높아지기 시작했고 마침내 7500년 전, 높아진 해수면은 터키 근해의 담수호였던 흑해를 덮쳤다. 흑해는 급격하게 확장되어 보스포루스 해협으로 바다와 연결되었고 흑해 연안의 농경지는 바닷물에 휩쓸려 사라져갔다. 보스포루스 해협이 수문이 되어 댐 역할을 하면서 엄청난 양의 바닷물이 흑해로 쏟아져 들어왔다. 당시 흑해의 해수면은 하루에 15cm씩 높아졌고 유입된 바닷물의 양은 나이아가라 폭포의 200배가 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흑해 연안에 살았던 사람들은 이 재해 속에서 떼죽음을 당했을 것이다. 운 좋게 살아남은 사람들 역시 어떤 이유로 갑자기 바다로 변해 버렸는지 이해할 길이 없었을 것이다. 신이 노해서 홍수를 일으켰다는 말만이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결국, 라이언-피트만의 가설은 '노아의 대홍수'와 기막히게 일치하는 셈이다. 심해탐험가 로버트 발라드가 이끄는 조사단이 흑해의 해저 100m근처에서 집터의 벽과 지붕, 기둥의 잔해들을 발견하면서 그들의 가설은 강력한 설득력을 얻었다.
해저음향탐사선은 바다 속의 돌도끼와 그릇조각 등도 촬영해 냈다. 발라드 팀은 이미 탄소동위원소 분석법을 통해 7000년 전의 흑해는 현재보다 200m나 낮은 해수면을 가진 담수호였다는 사실을 확인한 바 있다. 조사단의 일원인 프레드릭 허버트 펜실베니아대 교수는 직사각형으로 구획된 집터가 보였고 지붕과 벽의 회칠 흔적까지 확인할 수 있었다면서 찾아낸 집터의 흔적이 흑해 연안의 고대 농경지에서 발견되는 유적들과 거의 똑같다는 사실도 덧붙였다.
성경의 내용에 따르면 노아의 방주는 길이 300규빗, 너비 50규빗, 높이 30규빗이다. 규빗은 성인 남자가 팔을 편 상태에서 가운데 손가락 끝에서 팔꿈치까지의 길이를 말하는 것으로 당시 사람들의 신장을 고려할 때 45cm정도가 된다. 따라서 방주의 크기는 135m, 폭 22.5m, 높이 13.5m가 된다. 현재 생존하는 육상 생물체 17,600여 종의 암수 한 쌍씩 35,200마리의 동물을 실었을 경우 배 크기의 1/3정도에 해당한다. 따라서 방주는 동물 먹이의 공간을 고려하더라도 항해하기에 충분한 크기였던 것 같다.
그렇다면 이렇게 거대한 배가 과연 뜰 수 있었는지 폭풍우에 안전하였는지에 대한 의문이 생길 수 있다. 한국창조과학회에서는 해군사관학교 연구소에 노아의 방주의 안정성에 대한 실험을 의뢰한 적이 있었다. 이 프로젝트에서 해군사관학교 연구소는 계산을 통하여 풍랑에 대한 안정성, 전복에 견디는 능력, 견딜 수 있는 최고 파고 높이 등을 이론적으로 밝혀 냈다. 연구 결과 40m가 넘는 파도에서도 안정적으로 운항할 수 있으며 비교 연구한 10여종의 다른 선박형태에 비하여 가장 안정된 항해능력을 갖추었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렇다면 노아의 방주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구약성서에 따르면 방주는 아라라트 산에 내려 노아와 그의 가족들은 거기서 5개월을 머물렀다고 한다. 길가메쉬 서사시에서 우트나피수팀은 그의 배를 바그다드 동북쪽의 니시르 산 정상에 올려 놓았다고 한다. 어떤 탐험가들은 아라라트 산에서 32km 떨어진 주디(Cudi) 산 기슭에서 방주를 발견했다고 주장한다. 이 지점은 코란에서 말하는 곳과 일치한다.
고대부터 아라라트 산은 사람들로부터 무척 신성하게 여겨졌다. 아라라트 산은 노아의 방주와 에덴 동산이 있던 성지로 하느님의 출입을 금한 지역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기원전 300년 비빌로니아의 신관 베로소스는 방주가 있는 곳까지 올라간 사람들은 언제나 배에서 송진을 긁어내 악마를 물리치는 부적으로 삼았다고 기록했다. 마르코폴로는 동방견문록에서 "아무도 오를 수 없는 산봉우리...만년설로 뒤덮인 그 곳에 노아의 방주가 있다"고 썼다.
아라라트(Ararat) 산은 터키의 동부 아르메니아 고원에 있는 산으로 높이는 5185m로 터키, 이란, 아르메니아에 걸쳐 있다. 역사시대 이후 화산활동은 하지 않았으나 산 전체가 용암과 화산의 부스러기들로 덮여 있다. 산은 직경 40km로 2개의 산봉우리로 나뉘어져 있으며 최고봉인 대(大)아라라트 산은 1년 내내 빙하로 덮여 있다. 고고학자들은 산 정상 부근에 호수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 냈다. 이 호수는 일년 중 10달은 얼음에 묻혀 있기 때문에 위치조차 알아내기 어려운 곳에 있다. 성경의 내용을 그대로 믿는 사람들은 노아의 방주가 이 호수 안에 있다고 확신했으며 오래 전부터 아라라트 산을 정복하고자 노력해 왔다.
아라라트 산을 최초로 정복한 사람은 독일인 J. 파로트(Friedrich Parrot)였다. 1829년 그는 열악한 상황에서 부족한 등산장비로 정상을 정복하였으나 방주를 목격하지는 않았다. 1856년에는 영국의 무신론 과학자 세 명이 방주를 발견하고 기독교의 세력 확산을 막기 위해 방주에 불을 질렀고 자신들에게 길을 안내하였던 사람들이 그 이야기를 퍼뜨리지 못하도록 위협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방주는 만년설과 얼음강에 파묻혀 있었고 오랜 세월이 나무를 석화(石化, 돌처럼 딱딱해지는 현상)시켜 불에 타지 않고 보존되었다. 1876년 영국 대사 제임스 브라이스(James Bryce)는 수목한계선(나무가 자랄 수 있는 산의 최고 높이) 위인 3900m지점에서 사람의 손으로 다듬어진 오래된 나무 조각을 발견하였다.
20세기에는 더욱 구체적인 목격이 보고되기 시작했다. 1916년 제정 러시아 공군 조종사인 로스코비츠키 소위는 비행기로 아라라트 산 상공을 선회하던 중 방주로 보이는 물체가 1/4은 물 속에, 3/4은 눈 속에 파묻혀 있음을 보고 짜아르 황제에게 보고하였다. 그는 "눈 덮인 산꼭대기를 돌아 남쪽으로 날아가니 사파이어처럼 생긴 푸른 호수가 나타났다. 나는 낮게 떠서 그 언저리를 몇 번이나 돌았는데 거기에는 둥그스름한 지붕으로 덮인 묘하게 생긴 엄청나게 큰 배 한 척이 있었다"고 하였다. 황제는 150명의 군대를 두 개 조로 편성하여 파병하였고 이들은 한달 동안 등반하여 완전한 측량을 실시하였다. 1917년에 탐험대장은 사진과 함께 자세한 보고서를 황제에게 보냈다. 그러나 그 직후 러시아 제국은 볼셰비키 혁명으로 무너졌고 보고서와 사진의 행방은 알 길이 없다. 다음은 로스코비츠키가 황제에게 보낸 보고서의 일부이다.
방주는 수백개의 작은 방들로 나뉘어져 있었고 높은 천정을 가진 매우 큰 방들도 몇 개 발견되었다. 커다란 방들은 보통 그 방을 가로지르는 거대한 목재로 만들어진 울타리를 가지고 있었다. 울타리의 두께는 때로는 2피트가 되기도 하였는데 마치 코끼리보다 10배 더 큰 동물을 가두는데 사용된 것처럼 보였다. 다른 방들은 오늘날 가금류 전시장에서 보는 것과 같은 수많은 우리들이 열을 지어 나란히 있었는데 우리의 앞은 작게 가공된 철 막대들을 사용하여 막혀져 있었다. 모든 것은 왁스류의 페인트로 두껍게 칠해져 있었고 숙련공의 장인정신은 높은 수준으로 발달된 문명의 징후들을 보여주고 있었다. 전체에 사용된 나무는 서양협죽도로 사이프러스의 일종이며 겉에 페인트가 칠해져 있을 경우 전혀 썩지 않는다. 또한 대부분의 시간을 얼은 상태로 있었기 때문에 완전한 모습으로 보존될 수 있었다. 탐사대는 배의 한쪽면에서 없어진 나무가 재가 되어 남아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이 목재들은 산 꼭대기로 끌러 올려져 한 개의 방을 갖는 작은 성전을 짓는데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안에는 희생제를 위해 사용된 것과 같은 제단이 있었던 것 같다.
1960년, 터키 공군의 커어티스 소령은 아라라트 산을 촬영하던 중 해발 2000m의 산 허리에서 달걀 모양의 물체를 발견했다. 거듭된 화산폭발로 인한 용암 속에 묻힌 기이한 물체였다. 사진을 조사한 전문가는 노아의 방주라고 확신했다. 이 사진은 사진측량에서 세계적 권위를 가진 브런덴부르거 박사에게 보내졌는데 그는 그것이 틀림없는 배라고 단언했다.
1969년에는 미국의 고고학 탐험대가 대규모 조사단을 조직해 등정에 올랐다. 면밀한 조사 결과 북서부의 한 지점에서 깊이 6m의 빙하 밑바닥에 배 비슷한 물체를 발견했다. 커어티스 소령의 지점과는 차이가 나지만 크기는 약 150m가량으로 비슷했다. 이들이 회수한 나무 조각을 검사한 결과 4000~5000년 전의 것으로 밝혀졌다.
방주를 발견한 사람 중 가장 유력한 증거를 찾은 사람은 프랑스 사업가 Fernand Navarra이다. 그는 방주 사진을 촬영했을 뿐 아니라 얼음강에 잠긴 방주에 로프를 타고 내려가 나무 일부를 떼어내는 데 성공하였다. 이 조각은 이집트 농무성, 카이로 박물관 고고학부, 스페인 산림연구소 등에 보내져 고고학 및 산림학적 방법으로 측정한 결과 그 나무는 5000~6000년 전의 것으로 판명되었다.
그 외에도 방주를 목격하거나 사진을 촬영하고 자료를 수집한 사람들은 약 200여명에 달하며 이들의 증언에 따른 방주의 모양, 보존상태 등은 서로 일치한다. 또한 아라라트 산에서 수차례 인공위성에 의해 방주 모양이 촬영되기도 했다. 그리고 1987년에 터키 정부는 아라라트 산의 방주가 있는 지역을 관광지로 개발하기 위해 고속도로 공사를 시작했다.
그러나 과학자들은 지구 바닷물의 양을 계산하면 아무리 세계를 뒤덮을 만한 홍수가 일어났다 해도 3000m이상이나 되는 높이에 배를 올려 놓을 수는 없다고 단언한다. 그렇다면 아라라트 산의 배는 무엇일까? 발견된 나무 조각들은 후대 사람들이 성경의 내용을 바탕으로 방주의 상륙지점임을 기념하기 위해 만든 의식용 건조물의 일부일 가능성이 크다.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하는 이야기가 있다. 중세에 아라라트 산기슭에 있던 한 수도원이 많은 순례자들을 끌어들였다고 하는데 수도원이 노아와 그 가족의 유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수도사들이 산 정상에다 성경에 나오는 것과 같은 크기의 방주를 제작했을 것이다.
아라라트 산이 아닌 다른 곳에서 방주를 발견했다는 사람들도 있었다. 아라라트 산에서 이란 국경쪽으로 5km가면 우젠길리와 마샤르란 마을이 있는데 론 로날드 왓트와 데이빗 파솔드 두 교수는 이 곳에서 전자 레이더와 지질 탐사기를 이용하여 방주를 발견했다고 밝혔다. 방주는 구멍 뚫린 여섯 개의 돗을 닻 대신으로 사용했으며 폭풍을 대비해 모양은 우주선과 같은 모양으로 만들어졌다고 주장했다.
이 방주의 길이는 157m로 성경이 말하는 300규빗과 거의 일치한다. 그러나 폭이 48.8m로 상당한 수치상의 차이를 보이고 있는데 이것은 배의 파손 결과 넓어진 것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파솔드 교수는 모세가 수학적으로 매우 정확하게 배의 크기를 기록하였으며 이 규빗 단위는 히브리 개념이 아니라 이집트의 개념으로 기록되었다고 설명했다.
노아의 방주가 실재했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좀 있는 부분이 있다. 고대인인 노아가 그렇게 큰 배를 건조할 기술이 있었는지가 가장 큰 의문이다. 그리고 세계의 다양한 지역으로부터 모든 동물을 한 쌍씩 모아야 했다. 노아가 모르는 장소에만 사는 생물이 존재했을 것이며 모든 종을 모을 때 쯤이면 처음에 모였던 종들이 죽어가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창세기의 기록대로 모든 종을 모았다고 하더라도 같은 배 안에서 초식동물들이 육식동물의 먹이가 되지 않도록 관리할 수 있었는가 하는 문제가 생긴다. 여기에 추가로 8명의 사람이 그 많은 동물들에게 끼니를 맞추어 먹이를 줄 수 있었을까?
참고자료 : http://www.oldhome.pe.kr(폐쇄)
http://rathinker.co.kr/skeptic
엠파스 & 다음 백과사전 등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