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로이 목마(Trojan Horse)
테티스 여신의 결혼식 만찬이 열렸는데 불화의 여신 에리스는 초대를 받지 못했다. 에리스는 만찬장으로 가서 ‘가장 아름다운 여신에게’라는 문구가 새겨진 황금 사과를 던져 놓고 갔다. 이 사과를 두고 자기가 가장 아릅답다고 생각한 헤라와 아테나, 아프로디테가 서로 다투다가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에게 심판을 내리게 한다.
여신들은 파리스에게 자기를 가장 아름다운 여신으로 지목해 달라고 부탁한다. 헤라는 그에게 최고의 권력과 부를, 아테나는 전쟁에서의 승리와 영광을, 아프로디테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자를 아내로 얻어 주겠다고 약속했다. 파리스는 아프로디테에게 사과를 주었다. 결국 파리스는 아프로디테의 도움을 받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인 스파르타의 왕비 헬레네를 유혹해 트로이로 함께 도망갔다.
영화 '트로이' 포스터
헬레네는 그리스 전역에서 몰려온 구혼자들이 줄을 설만큼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문제는 헬레네가 그 중 어느 한 사람과 결혼하게 되면 그는 나머지 구혼자들의 적이 된다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오디세우스의 제안에 따라 누가 헬레네를 아내로 맞든지 혹시 누군가 그녀를 강제로 빼앗는 일이 생기면 구혼자였던 남자들 모두 힘을 합쳐 헬레네의 남편을 도울 것을 맹세했다. 헬레네는 가장 힘이 강했던 미케네 왕 아가멤논의 동생이자, 스파르타의 왕 메넬라오스의 아내가 되었다.
아내를 빼앗긴 스파르타 왕 메넬라오스는 복수를 하기 위해 트로이 원정에 나섰다. 맹세했던 구혼자들도 합류했다. 형인 아가멤논이 총사령관을 맡고 아킬레우스, 오디세우스, 아이아스, 디오메데스 등이 총출동한 그리스 연합군이 트로이로 진격했다. 트로이와 그리스, 양측 모두 신들의 지원과 방해를 받으며 오랫동안 전쟁이 계속되었다.
트로이 전쟁은 두 나라간 비슷한 전투력과 트로이의 강력한 요새로 인해 10년 동안 공성전을 벌였으나 끝이 나지 않았다. 그리스 군대는 오디세우스의 제안에 따라 거대한 목마를 만들고 30여명의 군인을 그 안에 매복시켰다. 그리스가 이 목마를 버리고 거짓으로 퇴각을 한다. 트로이인들은 전쟁이 끝난 것으로 여겨 그 목마를 승리의 상징이자 전리품으로서 성 안으로 들여 놓고 축제를 연다. 축제를 즐기고 모두가 잠든 밤, 목마 속에 숨어 있던 그리스 군인들이 나와 트로이의 성문을 열고 기다리고 있던 그리스 군대가 쳐들어오면서 트로이는 함락되고 말았다. 전쟁을 승리로 이끈 이 목마가 그 유명한 트로이 목마(Trojan Horse)이다.
호메로스의 서사시 <일리아스>에는 위와 같이 언급되어 있다. 헤로도토스의 <역사>에는 같은 내용이지만 조금은 다르게 언급되어 있다. 파리스가 스파르타에서 헬레네를 강제로 납치하여 트로이로 가던 중 배가 풍랑에 휩쓸려 이집트 바닷가에 도착한다. 그 때 파리스의 노예들이 이집트 신전으로 도망을 쳐서 파리스가 한 짓을 모두 고하고 이 사실은 결국 바다의 예언자 프로테우스에게 전해진다. 프로테우스는 파리스에게 헬레네와 보물들은 이집트에 두고 3일 안에 떠나라고 명령했다.
(영화 '트로이'의 한 장면)
한편 메넬라오스와 그리스 군은 트로이에 도착해 헬레네를 돌려달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트로이인들은 그녀가 트로이에는 분명히 없으며 이집트로 가보라고 했다. 트로이인들이 자신들을 놀리고 있다고 생각한 그리스인들은 트로이를 공격하여 함락했다. 하지만 성에서는 헬레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고 그들은 이집트로 향했다. 메넬라오스는 이집트에서 헬레네와 보물을 돌려받고 지극한 대우를 받았다. 그런데 그리스로 떠나기 전에 날씨가 나빠져 출발이 늦춰지자 그곳 주민의 아이 둘을 잡아 제물로 바쳤다. 그는 추격을 피해 얼른 배를 타고 리디아로 달아났다고 한다.
트로이 전쟁은 단지 신화로만 알려지다가 트로이 유적이 발굴되면서 그 존재가 증명되었다. 하인리히 슐리만은 트로이에 관한 이야기가 사실에 기초한 것이라고 생각했고 땅 속에 묻혀 있던 전설 속의 트로이를 발굴하는 성과를 올린다. 그는 후에 미케네도 발굴하게 되면서 고고학 역사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겼다.
트로이는 터키 아나톨리아 지방 북서부에 있는 트로아스 평야 히사를리크 언덕에 있다. 1870년 4월 이 지역에서 처음으로 발굴을 시작한 슐리만은 1873년 6월에 처음으로 트로이 유적을 발견했다. 황금잔과 왕관, 목걸이 등의 유물을 발견하였다.
슐리만은 처음부터 이 지역을 트로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당시 고고학계에서는 보다 내륙인 부나르바시 근교에 트로이가 존재했다는 설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슐리만도 최초에는 이 설을 주장했지만 이후 프랭크 칼버트라는 인물을 만나고 생각을 바꾸었다. 칼버트는 자신의 독자적인 연구를 통해 히사를리크 언덕에 트로이가 있었다고 확신했으며 이 언덕 땅의 일부를 직접 사들이기도 했다.
칼버트와 슐리만의 노력으로 발견된 트로이는 대단히 복잡한 유적이었다. 트로이 유적은 시대별로 총 9개의 층으로 구분할 수 있으며 맨 아래의 제1층은 기원전 3300-2500년 사이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여러 연구를 통해 제7층이 트로이 전쟁과 목마에 대한 유적으로 확인되었다. 그리고 당시 트로이는 미케네 문화권에 속해 있었으며, 주변의 바다를 지배하면서 무역으로 번영을 누렸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그 이후에도 수많은 고고학자들이 트로이 발굴에 참여했으며 지금도 계속 조사가 이루어지고 있다.
트로이전쟁은 그 신화적인 이야기 때문인지 문학과 예술에서 많은 작품으로 이어졌고, 트로이목마는 IT용어(바이러스)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참고자료 : 만화 헤로도토스 역사(2007년, 권오경 글, 진선규 그림, 주니어김영사)
고대유적(2001년, 모리노 다쿠미 저, 이만옥 역, 들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