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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문명.유물.유적

피리 레이스의 지도에 표시된 남극대륙

피리 레이스의 지도에 표시된 남극대륙

 1929년 터키의 이스탄불 황궁에서 역사학자 몇명이 오스만제국 시기인 16세기에 제작된 지도 조각과 제작자의 노트를 발견했다. 발견된 지도 조각을 보면 대서양, 남유럽, 북아프리카를 비롯하여 남아메리카 대륙의 최남단까지 이어진 동부 해안선도 표시되어 있다. 지도에 적힌 주석에 따르면 지도의 제작자는 피리 레이스라는 해군 제독이며 1513년에 만들었다고 한다. 이 지도를 피리 레이스의 지도(Piri Reis Map)라고 부른다.

피리 레이스 지도(피리 레이스 지도 - 출처 : ancientexplorers.com)

 이 지도의 발견 과정에 대한 여러 가지 이야기가 있다. 한 미국 청년이 오스만 제국 황녀를 구해주고 그 대가로 받은 것이라는 설, 지진으로 황궁이 무너졌는데 해군 제독 집무실의 벽에 숨겨져 있던 것이 발견되었다는 설 등이 있지만 대부분 사실무근이다. 이 지도는 1517년 술탄에게 공식적으로 제출되어 이스탄불의 톱카프 궁전(현재 박물관으로 이용)에서 계속 보관되어 왔다고 한다.

 피리 레이스의 노트에는 피리 레이스가 세계지도를 제작하기 위해 20장의 세계지도를 참고했다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그 중에 8장은 기원전 4세기인 알렉산드로스 대왕 시절의 지도이고, 한장은 아랍 사람이 그린 인도를 나타낸 지도이다. 또 다른 4장은 포르투갈에서 만들어진 인도양과 중국 일대의 지도였으며 콜럼버스가 그린 지도도 포함되어 있었다. 유감스럽게도 피리 레이스는 나머지 6장의 지도가 무엇인지 아무런 설명을 하지 않았다.

 한 학자가 지도 위쪽에 있는 주석을 자세하게 살펴본 결과, 이 지도는 세계지도의 일부분으로 전체 지도는 지중해, 인도양, 동아시아 지역을 포함한 것이 틀림없다고 판단했다. 피리 레이스의 지도가 등장하자 역사학계에 연이어 논쟁이 벌어졌다.

 일부 학자들은 피리 레이스의 지도에 표시된 남아메리카 해안선이 콜럼버스에게서 나온 것이라고 섣부르게 판단했다. 콜럼버스는 1492년에 최초로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했으므로 시기상으로 맞아떨어진다. 그러나 콜럼버스가 4차례에 걸쳐 아메리카 대륙으로 항해를 한 것은 맞지만 남반구까지 간 적은 없었다. 1520년에야 마젤란이 남아메리카 해협을 발견하여 대서양에서 태평양으로 항해했다. 즉, 1513년에 그려진 피리 레이스의 지도에 남아메리카 동부 해안선이 표시된 것은 콜럼버스의 지도가 아닌 다른 지도를 참고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피리 레이스 지도(출처 : ancientexplorers.com)

 피리 레이스의 지도가 던진 의혹은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것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그의 지도에 남극대륙이 그려져 있다는 주장이 등장했다. 1820년 미국의 포경선이 남극 대륙에 포함된 섬을 발견했고, 1821년 러시아의 벨링스하우젠(Von Bellingshausen) 제독이 대륙에 첫발을 디뎠다고 한다. 최초로 발견되었을 때는 온통 얼음으로 덮여 있었을 뿐 그것이 대륙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1949년 영국-스웨덴 합동조사단이 지진파를 이용하여 얼음 밑에 땅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그렇다면 피리 레이스는 어떻게 남극지도를 그릴 수 있었을까?

 1960년대 중반에 미국의 퇴역 해군 장교인 알링턴 맬러리(Arlington Mallery)는 이 지도의 오른쪽 아래에 있는 해안선이 남극대륙의 퀸모드랜드(Queen Maud Land, 남극대륙의 서경 20°~동경 45°에 이르는 광대한 부분)의 윤곽과 매우 비슷하다는 것을 알아냈다. 퀸모드랜드는 1930년대에 발견되었는데 1513년에 제작된 피리 레이스의 지도에 그려진 것은 매우 불가사의한 일이었다. 맬러리는 피리 레이스가 옛사람이 제작한 세계지도를 가지고 있었을 것으로 추측했다. 일부 역사학자에게서 돌아온 반응은 대부분 비웃음에 가까웠다.

 하지만 찰스 햅굿(Charles Hapgood) 교수는 맬러리의 주장에 흥미를 느꼈다. 햅굿 교수는 지도의 오른쪽 아래에 있는 지역의 윤곽은 남극의 일부 해안선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피리 레이스(출처 : ancientexplorers.com)

 피리 레이스의 지도는 정거방위도법(지도의 중심에서 세계 각지에 이르는 최단 통로와 그 거리 및 방위각을 알 수 있는 도법)으로 제작되었다. 정거방위도법은 쉽게 말해 높은 곳에서 땅을 내려다 본 모습을 묘사한 것과 같은 방법이다. 지도는 공중에서 내려다본 그대로 중앙에서 멀리 떨어진 대륙이 길게 그려지는 왜곡현상까지 나타난다. 찰스 햅굿 교수와 수학자인 리차드 스트라첸은 피리 레이스의 지도가 대단히 높은 고도에서 촬영된 항공사진에 의해 제작되었음이 틀림없다고 결론지었다.

 그러나 햅굿 교수는 피리 레이스가 어떻게 1513년에 남극대륙의 윤곽을 알았는지 설명할 수 없었다. 햅굿 교수가 자신의 가설을 완성하지 못하자 학계는 비판을 쏟아냈다. 한 역사학자는 옛사람이 어떤 방식으로 남극에 도달했는지 그리고 어떤 기술적인 수단으로 남극대륙의 윤곽을 그렸는가라는 일련의 문제를 제기했다.

오론테우스 피나에우스의 세계지도(오론테우스 피나에우스의 세계지도 - 출처 : certitudinea.ro)

 햅굿 교수는 자신의 가설을 증명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였다. 그는 1960년대 미 공군에 피리 레이스의 지도를 의뢰하여 남극이 그려진 것이라는 회신을 받았다고 한다. 또, 미국의 의회도서관에서 오론테우스 피나에우스가 1531년에 제작한 세계지도(Oronteus Finaeus Map)를 찾아냈다. 이 지도는 정축법과 방위투영법을 택하여 완전한 남극대륙을 그리고 있다. 그 외에도 16세기에 남극대륙을 표현한 지도가 몇 점 더 확인되었다. 이로써 16세기 이전에 인류가 남극대륙의 존재를 이미 알고 있었다는 주장을 뒷받침하게 되었다.

 어떻게 16세기의 지도에 19세기 들어 발견된 남극대륙이 나타날 수 있었는지 설명할 길을 아직 찾지 못했다. 피리 레이스의 지도는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적 상식과 다르게 남아메리카와 남극대륙의 일부가 그려져 있어 오파츠(OOPARTS, 시대와 일치하지 않는 인공물)로 분류되기도 한다. 특히 이보다 100년 뒤에 그려진 지도보다도 남아메리카를 정확하게 표현하고 있다고 한다. 남극대륙이냐 아니냐보다 이 부분에서 그 가치가 충분히 중요한 유물이다.


참고자료 : 고지도의 비밀(2011년, 류강 저, 이재훈 역, 글항아리, p95-105)

https://namu.wiki/w/피리 제독의 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