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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를 보다

토정비결을 만든 이지함

토정비결을 만든 이지함

#이지함의 생애

 새해가 되면 우리는 한해의 운수를 점쳐보는 토정비결(土亭秘訣)을 들여다본다. 토정비결의 저자로 알려진 이지함(李之菡, 1517-1578). 토정비결에 가려진 이지함은 실체가 드러나지 않는 미스터리한 인물로 자리잡은 채 많은 사람들에게 관심의 대상이 되어 왔다.

 이지함은 1517년 이치의 아들로 충청도 보령에서 태어났다. 이치가 41세 때 낳은 막내아들로 출생부터 신령스러운 정기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그의 본관은 한산이다. 한산 이씨는 고려 말의 성리학자 가정 이곡과 목은 이색을 배출한 명문가로 이색은 이지함의 7대조가 된다.

토정비결, 이지함

 장성하여서는 보통 사람보다 머리 하나는 더 있는 건장한 체격에 얼굴은 둥글고 살이 붙어 있지만 검은 피부에 눈은 빛나고 목소리는 웅장하였다. 특히 발이 한 자(약 300mm)가 넘었다는 표현이 있을 정도로 기골이 장대한 인물이었다.

 이지함의 호 토정(土亭)은 ‘흙으로 만든 정자’라는 뜻으로 지금의 마포 강변에 허름한 집을 짓고 밤에는 그 속에서 자고 낮에는 지붕을 정자 삼아 글을 읽었다는 데서 유래한 것이다.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형인 이지번의 밑에서 글을 배우던 토정은 가장 사랑하던 친구 안명세가 사화에 휘말려 죽은 뒤에 서경덕의 문하에 들어갔다. 후일 수리, 의학, 복서, 천문, 지리, 음양, 술서 등에 달통하게 된 것은 스승 서경덕의 영향으로 알려져 있다.

 이지함은 해양자원과 수공업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이것은 무엇보다 이들 산업이 국부의 증진과 민생 안정에 유용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성리학의 이론 논쟁을 학자들만의 쓸데없는 것이라 비판하고 보다 현실적으로 대응하려 한 그의 사상은 당대보다는 후대의 실학자들에 의해 널리 수용되었다. 유형원이나 박제가가 그의 사상을 높이 평가한 대표적인 실학자이다.

 이지함이 살았던 16세기 중후반의 조선은 사림파와 훈구파의 대립에서 발생한 사화와 민란 등이 끊이지 않고 일어났던 혼란의 시기였다. 이처럼 정치적 혼란의 시대상황 속에서 출사의 뜻을 포기하고 산림에 은거하며 학문에 전념하는 학자들이 나타났다. 이지함은 이러한 처사형 학자로 분류되는 인물이다. 이지함이라는 인물의 사상과 역사적 위상보다도 그의 저술로 알려진 토정비결에 관심이 집중되거나 기인의 풍모 등으로 야사의 단골 소재가 되곤 했다.

# 이지함의 기행

 그래서일까? 이지함은 기행을 일삼았다는 이야기가 여럿 전해진다. 그는 구리로 만든 노구솥을 머리에 쓰고 그 위에 패랭이를 얹어 밤낮으로 다녔다. 허기가 있으면 노구솥을 벗어 시냇가에 걸어두고 밥을 지어 먹은 후 씻고 말려 다시 머리에 썼다. 잠을 자고 싶으면 길가에서 지팡이를 짚고 서서 잤다. 오고가는 소나 말이 부딪쳐서 동서로 옮겨 다니다가 5-6일 후에 비로소 깼다.

 팔도를 두루 유람하면서도 탈것을 빌리지 않고 다녔다. 천한 사람의 일을 몸소 겪어보지 않은 것이 없었노라고 스스로 여기고는 남에게 매 맞는 것까지도 스스로 자청해 시험해보려 하였다.

 하루는 민가에 들어가 부부의 곁에 앉으니 주인이 크게 노하여 그를 때려서 내쫓으려다가 늙은이였기에 그냥 내쫓았다. 또 볼기를 때리는 형벌을 받으려고 일부러 관인의 앞길을 침범하였는데 관인이 노하여 태형을 내리려 하다가 그를 한참 쳐다본 후 형상이 기이하므로 그만두었다고 한다.

# 토정비결의 원리

 이지함이 의학과 복서에 밝다는 소문이 퍼지자 찾아오는 사람이 늘고 1년 신수를 보아달라는 부탁이 많아짐에 따라 책을 지었고 그것이 토정비결이라고 알려져 있다.

 인간에 대한 애정은 평생토록 지속된 토정 이지함의 삶의 철학이었다. 토정비결을 집필하게 된 동기도 그 밑바탕에 흐르고 있는 사상도 이러한 그의 철학에서 비롯된 것이라 짐작할 수 있다.

 토정비결은 주역의 괘를 기본으로 하지만 생시가 빠진 생년·월·일의 3가지를 가지고 괘를 본다. 주역보다 간단하기 때문에 쉽게 운명을 점칠 수 있게 하는 책이다.

 토정비결은 태세(太歲), 월건(月建), 일진(日辰)을 숫자적으로 따져서 상·중·하의 세 괘를 만들고 이를 주역의 음양설에 비추어 인간의 1년 길흉화복(신수)을 설명하는 예언서로 모두 144장 7,056괘로 이루어져 있다. 144장은 001에서 144까지가 아니라 111에서 863까지이다.

 여기에서 백자리는 태세수(8가지), 십자리는 월건수(6가지), 단자리는 일진수(3가지)다. 그것은 토정비결의 모태가 된 주역의 8괘, 6효와 변수 3을 근거로 한 것으로 보인다. 그 각각의 경우를 구하면 토정비결이 다루고 있는 144가지(8X6X3)의 1년 신수가 나오는 것이다.

토정비결, 60갑자 조견표(60갑자 조견표 - 출처 : 7minutes.co.kr)

 상수는 (나이+태세수)/8의 나머지, 중수는 (생월+월건수)/6의 나머지, 하수는 (생일+일진수)/3의 나머지를 각각 백자리, 십자리, 단자리로 하여 144장 중에서 일치하는 신수를 확인하면 된다. 나누어떨어지는 경우는 각각 8, 6, 3으로 한다. 이 때 육십갑자에 따른 태세수, 월건수, 일진수가 표시된 조견표에서 해당 값을 찾아서 계산하게 된다.

 토정비결은 또 주역의 64괘를 2괘씩 묶어 풀이의 기초로 삼고 있는데 128을 초과하는 16괘는 같은 괘의 조합을 사용하여 144가지를 맞추었다. 토정비결이 다루고 있는 144장에 대해서는 12가지 띠 별로 12가지씩 운세를 배정하다 보니 144장으로 맞추어졌다는 설도 있다.

# 토정비결은 이지함의 저작인가?

 무엇보다 이지함을 유명하게 만든 것은 토정비결이다. 대부분의 사람이 토정비결을 이지함의 저서로 알고 있다. 그러나 토정비결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이지함의 저작이라는 설과 그의 이름을 후대에 가탁(빌려서 씀)한 것이라는 주장으로 의견이 분분하다.

 토정비결이 이지함 사후에 유행하지 않고 19세기 후반에 널리 퍼진 점 등을 고려할 때 이지함의 이름을 가탁한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이지함 사후 100여년 후인 숙종 때 그의 고손자 이정익이 토정의 유고를 모아 간행한 ‘토정유고’라는 책에 토정비결에 대한 내용이 없다. 만약 당시에 토정비결이 유행했다면 반드시 이 유고에 포함되었을 것이다.

 또한 정조 때 홍석모가 쓴 ‘동국세시기’에는 조선 후기의 풍속 전반에 관한 내용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는데 정월의 경우 세배하기나 세찬, 떡국 먹기 등 새해 풍습과 새해의 신수를 보는 오행점을 기록하고 있다. 같은 시대 유득공이 서울의 세시풍속에 대해 쓴 글 ‘경도잡지’에도 새해의 풍속 중 ‘윷을 던져 새해의 길흉을 점친다’는 기록은 있지만 토정비결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다.

 만약 토정비결이 조선 후기에도 유행했다면 ‘동국세시기’나 ‘경도잡지’에 결코 빠지지 않았을 것이므로 이는 결국 토정비결이 널리 유행한 것이 최소한 19세기 이후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토정비결(토정비결 - 출처 : yhdbookmuseum.com)

 반대로 이지함의 저작이라고 볼만한 근거도 있다. 토정비결이 담아내고 있는 뜻을 보면 이지함의 사상과 통하는 측면이 많아 단순히 그 관계를 부정할 수만은 없다. 토정비결은 주역을 바탕으로 하여 상수학의 사고를 많이 드러내고 있는데 이지함이 서경덕에게서 상수학을 배운 사실은 둘의 연관성을 넓혀준다.

 스승 서경덕 등 당시 주역이나 상수학에 조예가 깊었던 학자들이 리(理)보다는 기(氣)에 관심을 가지면서 사회 기반을 안정되게 이해하지 않고 당대를 변화가 일어나야 할 시점으로 파악한 점과 이지함이 그러한 사상을 주역을 통해 배웠다는 점을 고려하면 주역 사상에 내포된 변혁 의지가 토정비결에도 반영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논란을 떠나서 토정비결의 저자로 이지함을 떠올리는 것은 무엇보다 그가 지닌 친민중적인 성향 때문이다. 이지함이 민간에 친숙한 인물이었다는 점은 야사류의 책에서 그에 관한 기록에서도 발견된다.

 점술이나 관상비기에 능했던 이지함의 행적이 민중들에게 널리 전파됐고 19세기 이후 비결류의 책을 만들면서 토정비결이란 이름을 가탁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지함의 이름을 딴 책을 만들면 많은 사람들에게 호응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지함이 평소 언급했던 내용들 일부가 오랜 세월 구전으로 내려오다 토정비결에 반영됐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토정비결의 현대적 의미

 토정비결을 읽다보면 이 책이 운명을 판단하는 도구라기보다는 윤리적인 실천강령이나 도덕률로서 더 유용하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든다. 유교, 불교, 도교, 무속에 입각한 인간의 행동준칙을 설명하는 부분이 많아 매우 교훈적이기 때문이다.

 토정비결을 보면 가장 많이 나오는 것이 ‘조심하라’는 말이다. 토정비결의 또 하나의 특징은 70% 이상이 행운의 괘로 구성된 사실이다. 토정비결을 보는 사람들은 대부분 희망과 행운의 메시지를 얻을 수 있다. 불운에 관한 괘들도 조심하면 길함이 있다는 식으로 해석하여 불행을 피할 수 있게 한다. 이러한 점에서도 민중들에게 위안을 안겨준 이지함의 사상과 토정비결은 그 맥락을 같이 한다.

 토정비결은 운명이란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개척하기에 달려 있다는 것을 역설하고 있다. 조심하면 액은 피해갈 수 있고 덕을 쌓고 성심을 다하다 보면 누구나 출세하고 잘 살 수 있다고 격려하고 있는 것이다.

 토정비결은 사람들에게 덕을 쌓고 선을 취하며 악을 멀리할 것 등 삶의 기본적인 모형을 제시해주는 스승으로서 또 한편으로는 인생의 고달픔을 위로하고 희망을 불어넣는 벗으로서 우리 시대에 사랑을 받고 있다.


참고자료 : 이지함 평전(2008년, 신병주 저, 글항아리)

진본 토정비결(2000년, 이재운 편역, 동학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