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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조직] 템플 기사단을 둘러싼 의문과 음모론

[비밀조직] 템플 기사단을 둘러싼 의문과 음모론

 템플기사단(Knights Templar)은 중세 십자군 전쟁의 3대 종교기사단 가운데 하나로 성지와 순례자 보호를 목적으로 설립된 서방 교회의 기사 수도회입니다. 정식 명칭은 ‘그리스도와 솔로몬 성전의 가난한 기사들(Pauperes commilitones Christi Templique Solomonici)’이며 성전기사단 또는 성전수도회라고도 불립니다.

템플기사단, Knights Templa템플기사단(출처 : Wikimedia Commons)

 1118년 샹파뉴 기사인 위그 드 파양스(Hugues de Payens)를 비롯한 9명의 기사들이 모여 결성하였으며 성 베르나르두스의 후원으로 1128년 수도회로서 교황의 공인을 받았습니다. 예루살렘의 보두앵 2세(Baldwin II)는 기사단에게 왕궁 옆에 거처를 마련해 주었는데 그곳은 예전에 솔로몬 성전이 있던 지역이었습니다. 여기에서 이 단체의 명칭이 유래하였습니다.

 교황의 공인을 받으면서 기사단을 빠르게 성장하였습니다. 단원들은 붉은색 십자가가 표시된 흰색 겉옷을 입었는데 이는 템플기사단의 상징입니다. 예루살렘의 솔로몬 신전 터를 본거지로 삼아 대부분 십자군 전쟁의 격전지에서 활동하였는데 시리아와 팔레스타인 각지에 성을 쌓고 성지 방어의 주력으로 활약하였습니다.

 유럽의 군주와 제후, 시민들에게 절대적인 신뢰를 얻어서 기부받은 토지와 자금이 많았으며 농목업, 무역활동, 금융업 등을 널리 행하면서 거대한 부를 축적하였습니다. 하지만 성전 기사단의 비밀 입단식에 대한 루머가 만들어지면서 이단으로 의심을 받았습니다.

 1291년 성지 함락 후 키프로스 섬으로 후퇴하면서 십자군 전사로서의 존재이유를 상실하게 됩니다. 이후 1307년에 이르러 프랑스 왕 필리프 4세(Philip IV)가 이들을 이단으로 간주하고 프랑스 각지에 있는 3,000여 수도원의 회원들을 모두 체포하고 재산을 몰수하였습니다. 후원자인 왕들은 기사단의 세력이 강해지는 것을 점차 경계하게 되었고, 기사단에 큰 빚을 지고 있던 필리프 4세가 왕권 강화를 위한 목적으로 이들을 이용하였습니다.

템플기사단과 필리프 4세템플기사단과 필리프 4세(출처 : Wikimeida Commons)

 그 후 6년간 이단 심문을 단행하면서 단원들은 고문을 통해 거짓 자백을 강요받았으며 화형에 처해졌습니다. 교황 클레멘스 5세(Pope Clement V)의 항의와 별도 조사를 위한 빈 공의회가 12년간 계속된 끝에 결국 1312년에 교황 클레멘스 5세의 해산령을 내렸고 템플기사단은 해체되고 말았습니다. 마지막 단장인 자크 드 몰레(Jacques de Molay)가 화형에 처해지고 기사단의 재산은 요하네스 기사 수도회로 이관되었습니다.

 자크 드 몰레가 화형을 당하기 직전에 자신이 죽은 뒤 1년 안에 국왕과 교황 모두 죽을 것이라고 저주를 퍼부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한달 뒤 교황이 죽었고 필립 4세 또한 7개월 뒤에 죽었다고 합니다.

 강력했던 중세의 기사단이 한순간에 해산되어 버린 이야기는 많은 의문점과 음모론을 낳았습니다. 당시 막강한 정보력을 갖춘 기사단이 오랫동안 기획된 기사단 체포 계획을 정말 몰랐는지 여부입니다. 그들이 중요한 비밀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를 희생함으로써 그것을 지켰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그리고 소수로 살아남은 기사들이 유럽 각지로 퍼져서 기사단의 비밀을 지켰다고 합니다.

 솔로몬 신전을 본거지로 하면서 어떤 중요한 비밀을 알게 된 것은 아닐까요? 예루살렘 입성 후 폐허가 된 신전 근처에 머문 것은 다른 목적이 있었다는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습니다. 전설에는 이들이 솔로몬 왕의 신전 옛터에 숨겨져 있던 보물을 손에 넣게 되었고 이로 인해 단원들이 모두 큰 부자가 될 수 있었다고도 합니다.

 템플 기사단이 솔로몬 신전에서 종교적으로 매우 중요한 어떤 것을 발견하였다고 하며, 성배와 성궤같은 보물을 로슬린 성당의 은밀한 곳에 묻어놓았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음모론에 따르면 14세기 최후의 기사들이 스코틀랜드로 도피했다가 스코틀랜드 독립전쟁에서 로버트 브루스를 지원했고 배넉번 전투에서 승리에 기여한 것이 프리메이슨의 기원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150년 후 로슬린 성당을 건설했는데 이는 훗날 ‘스코티시 라이트(Scottish rite)’라는 프리메이슨의 본거지로 성장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기사단과 프리메이슨 사이에 역사적 증거는 찾을 수 없다고 합니다.

템플기사단 상징템플기사단 상징(출처 : Wikimedia Commons)

 1797년 프랑스의 예수회 신부 아베 바뤼엘은 저서에서 프랑스 혁명은 프리메이슨이 배후에서 조종했으며, 루이 16세를 처형시켜 필립 4세의 후손에게 400년 만의 복수가 성공했다고 적었습니다. 일설에 의하면 1793년 루이 16세가 처형되는 순간 누군가 “자크 드 몰레여! 드디어 복수했습니다”라고 외쳤다고 합니다.

 기사단은 1312년에 정식으로 해체되었으나 프랑스를 제외한 다른 나라들에서는 그다지 탄압이 없었기 때문에 살아남은 이들은 이름을 바꾸고 잠적하거나 다른 기사단에 흡수되는 형태로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많은 단체들이 자신들의 신비성을 강조하기 위한 의도로 템플기사단과의 연관성을 내세웠습니다. 하지만 템플기사단과 역사적 연관성이 뚜렷한 근현대의 단체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18세기 이후로 프리메이슨이 중세의 여러 기사수도회의 의식과 상징들을 차용하기 시작한 사실이 있습니다.


참고자료 : https://namu.wiki/w/성전 기사단

https://ko.wikipedia.org/wiki/성전기사단

괴물딴지 미스터리 사전 스페셜(2007년, 유상현 저, 해냄, p273-2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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