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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신비

살아있는 화석 물고기, 실러캔스

살아있는 화석 물고기, 실러캔스

 경골어류 총기아강 공극목(空棘目) 어류의 총칭인 실러캔스(Coelacanth). 고생대 데본기에서 중생대 백악기까지의 바다에 생존했던 물고기이다. 실러캔스의 화석은 4억년 전 지층에서 가장 많이 나왔고 차츰 줄어들면서 7000만년 전 생성된 지층에서부터는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 그래서 7000만년 전에 멸종된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1938년의 그 일이 있기 이전에는...

실러캔스(Coelacanth)     실러캔스(Coelacanth)

 1938년 12월 22일,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이스트런던의 찰룸나강 하구의 5km 앞바다의 수심 60m 해저에서 기묘하게 생긴 물고기가 포획되었다. 물고기를 포획한 저인망어선인 네린호가 소속된 애비니 존슨 어업회사는 이스트런던의 박물관장인 M. C. 래티머에게 연락을 취했다. 래티머는 물고기의 스케치와 소견을 붙여 그레엄스타운 대학의 어류학자인 J.L.B. 스미스에게 보냈다. 스미스는 그것이 자신이 그토록 찾아 헤매던 실러캔스의 신속 신종(新屬新種)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그는 래티머와 찰룸나 강의 이름을 기념하여 라티메리아 찰룸나(Latimeria Chalumnae)라는 학명을 붙여 1939년 3월 18일자의 <네이처> 지에 발표하였다(당시 어부들에 의해 물고기가 훼손되어 뼈와 비늘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그래서 스미스는 '정체불명의 화석어'라는 말을 사용했다).

 유스테노프테론은 다른 물고기와 달리 콧구멍이 입 안으로 뚫려 있어 공기를 들이마실 수 있었다. 또 가슴지느러미와 배지느러미가 아주 튼튼해서 땅 위를 길 수도 있었다. 스미스는 이들은 땅 위로 올라와 양서류의 조상이 된 것으로 보았고 이들이 땅에서 적응하지 못하자 다시 물로 돌아간 것이 바로 실러캔스라 생각했다. 스미스 박사는 오랫동안 실러캔스를 찾아 헤맸다. 그는 실러캔스를 찾음으로써 더 확실하게 진화를 연구하려고 하였다. 이미 7000만년 전에 멸종한 물고기를 찾으려고 한 것이다.

 많은 학자들이 그를 비웃었지만 스미스는 나름대로의 믿음이 있었다. 유스테노프테론이 땅 위에서 멸망한 뒤 그보다 더 물고기에 가깝게 진화한 실러캔스 화석이 나타났는데 이것이 실러캔스가 살아 남아 있다는 증거이다. 물 속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진화된 실러캔스가 바다에 적응하지 못했을 리 없었다. 스미스는 허파가 퇴화해 미처 완전한 물고기로 변하지 못한 실러캔스가 깊은 바다에서만 살고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 그의 노력은 결국 성공했고, 실러캔스가 세상에 알려지면서 고생물학계에 흥분을 일으켰다.

 그 후 1952년까지 100마리의 실러캔스가 잡혔으며, 마다가르카스 섬과 동아프리카 사이에 있는 코모로 제도 연안의 안주앙 섬 앞바다에서 포획된 실러캔스는 등지느러미의 숫자와 꼬리지느러미의 모양이 라티메리아 찰룸나와 다른 것이 확인되었다. 이의 반출을 도와준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말란 총리와 포획장소를 기념하여 말라니아 안주아나(Malania Anjuanae)라는 학명이 붙었다. 한국에도 1985년 모로코 정부로부터 기증받은 박제(剝製) 실러캔스가 63빌딩에서 전시되기도 하였다.

실러캔스(Coelacanth)

 실러캔스는 지금까지 28속, 70종 정도가 알려져 있다. 현재까지의 조사에 의하면 수심 150~500m의 깊은 바다에 서식하며 몸길이는 1.4~1.6m정도, 몸무게는 65~80kg정도라고 한다. 지느러미에 자루부가 있는 것이 특징이며, 특히 가슴지느러미와 배지느러미가 크고 이것으로 해저를 기어다니는 것으로 추측된다. 비늘은 크고 3중으로 겹쳐져 있으며 색깔은 균일한 푸른색을 띤다. 척추는 연골이며 속이 빈 관상으로 되어 있다. 실러캔스가 고생물학적으로 특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은 해수와 기수(汽水) 양쪽에 서식하였으므로 고생대 데본기에 최초로 나타난 육상 동물인 양서류의 진화와 관계가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실러캔스는 발견되는 숫자가 적었기 때문에 그 생태연구에 있어서 상당한 어려움이 있었다. 영국인 동물학자인 데이비드 아텐버러는 잡힌지 몇 시간이 지나 숨이 넘어가기 직전의 실러캔스를 구했다. 그는 궁리한 끝에 실러캔스를 다시 바다에 놓아 준 뒤 바위가 많은 곳에서 헤엄치는 모습을 촬영했다. 이 촬영으로 뼈가 들어 있는 단단한 지느러미가 육지 동물의 네 다리와 똑같은 구실을 한다는 것이 밝혀졌다. 물고기로 완전히 진화하지 못한 양서류의 특징이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죽어가던 물고기의 행동이었으므로 완전한 관찰이라고 보기는 어려웠다.

 1986년 7월 초, 일본 학술조사대가 길이 140cm, 무게 65kg의 실러캔스를 산 채로 잡아 그물망에 넣고 헤엄치는 모습을 촬영하였고, 1987년 1월 17일에 독일(당시 서독) 막스플랑크 연구소의 해양생물학자인 한스 프리케가 그랜드 코모로 섬 서쪽 180m지점에서 잠수정을 타고 내려가 수심 168m에서 실러캔스 2마리가 서식하는 모습을 모두 촬영하는데 성공함으로써 실러캔스의 생태에 대한 궁금증은 모두 풀렸다.

 실러캔스의 화석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실러캔스가 태생이라는 주장이 나왔다. 1926년, 런던대학교의 왓슨 교수는 독일 졸른 호펜의 쥐라기 석회암에서 보존이 잘 된 실러캔스 화석을 발견했다. 놀랍게도 실러캔스의 복강에서 작은 새끼 2마리를 발견하게 되었다. 화석의 연구결과가 결정적일 수는 없었으나 왓슨 교수의 발표 이후에는 줄곧 실러캔스가 태생이라고 믿어져 왔다.

 1955년 2월 12일에 잡힌 실러캔스를 해부한 결과 지름 1~2cm의 알이 10개정도 발견되었다. 1960년 1월 1일에 잡힌 실러캔스의 난소에서도 더 발달되고 색깔이 특이한 7cm의 알들이 발견되었다. 이 때 커다란 실러캔스의 알을 처음 보게 되었으며 실러캔스에겐 알을 보호할 만큼 단단한 껍데기를 만드는 조직이 없다는 것도 밝혀졌다. 이와 더불어 실러캔스가 다른 물고기들처럼 난생이라는 주장이 등장했다. 실러캔스의 발생기관을 해부한 결과, 태생이라는 증거가 나타나지 않자 결국 난생설이 자리를 잡아갔다.

 그러다가 1972년 국제공동 탐험단의 일원이었던 로버트 그리피스 박사와 필라델피아 과학원의 키드 톰슨 교수가 실러캔스의 난생설에 의문을 제기했다. 실러캔스의 커다란 알은 난태생의 상어알과 비슷하며 여러 면에서 상어와 비슷한 어류이기 때문이다. 또, 난생이라면 그렇게 큰 알은 반드시 단단한 껍질로 싸여 있어야 하는데 껍질도 단단하지 못했다. 결정적인 증거는 1975년에 나왔다. 1962년 1월 8일에 잡힌 실러캔스를 해부하는 과정에서 놀랍게도 노른자주머니가 달린 거의 다 자란 새끼 5마리가 발견되었다. 새끼들의 길이는 약 36~43cm, 노른자주머니는 약 6cm정도였다. 이것으로 실러캔스는 난태생이라는 것이 밝혀지게 되었다. 새끼들은 어미 몸 속에서 12달 정도를 지낸 후에 나오는 것으로 추정된다.

 실러캔스에 대한 연구는 20세기의 가장 큰 수확 중에 하나로 꼽힌다. 실러캔스와 같은 시기에 살았던 동물들이 아직도 깊은 바다 속에 살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참고자료 : http://www.oldhome.pe.kr(폐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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