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9년 어느날, 샌프란시스코 불리틴 신문사에 초라한 행색의 한 남자가 찾아왔습니다. 그는 자신을 미국의 황제 노턴 1세라고 주장하며 자신이 작성한 황제 취임 선언문을 편집장에게 건넸습니다. 황당하지만 호기심이 일었던 편집장은 신문 판매 부수를 염두에 두고 황제 취임 소식과 성명을 신문 1면에 실었습니다.
샌프란시스코 시민들의 반응은 폭발적이었습니다. 당시 미국에서는 노예문제를 두고 남과 북이 서로 대립하면서 정당 간의 싸움이 빈번했습니다. 그러던 중에 노턴 1세가 나타나 정치인들의 부정부패를 질타하고, 제임스 뷰캐넌의 대통령직 박탈과 의회 해산 등을 명령하자 기존 정치에 염증을 느꼈던 시민들이 그에게 호감을 보인 것이었습니다.
그의 본명은 조슈아 에이브러햄 노턴(Joshua Abraham Norton). 대통령제의 정치제도를 가진 미국의 최초이자 마지막이었던 황제를 자처한 인물입니다. 그는 원래 영국 런던 출신으로 어릴 때 가족 모두 남아공 케이프타운으로 이주했습니다. 일찍이 상업에 종사해서 돈을 많이 벌었으며 1848년 사망한 아버지의 가산을 처분하고 4만 달러를 가지고 브라질로 갔다가 1849년 골드 러시가 터진 캘리포니아 샌프란시스코로 이주하게 되었습니다. 노턴은 금보다는 다른 사업에 관심이 많았는데 부동산에 투자하거나 여러 개의 잡화점을 운영하기도 하였습니다. 1853년에는 당시 돈으로 25만 달러나 모았습니다.
그 당시 캘리포니아 지역에서는 청나라로부터 쌀 수입을 하고 있었는데 태평천국의 난이 일어나고 기근이 들어 쌀 수출 금지령이 내려지자 미국에서 4센트 정도였던 쌀값이 36센트까지 폭등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노턴은 쌀 수입업자에게 선금을 주고 쌀을 매입하기 시작했습니다. 쌀값은 계속 올라 1파운드당 50센트까지 폭등하게 되었는데 욕심이 생긴 노턴은 가격이 더 오르기를 기다렸습니다. 이후 페루산 쌀이 들어오면서 쌀값은 폭락하기 시작했고 순식간에 3센트까지 떨어졌습니다. 노턴은 본전도 못 건질 위기에 처하자 계약을 일방적으로 파기했고, 소송에서 패한 그는 2년 후 파산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몇년 동안 샌프란시스코를 떠나는데 그 동안의 행적은 알려진 것이 없습니다.
노턴 1세는 자신이 가진 낡은 육군 대령 군복 한 벌만을 입었고 특별한 직업없이 초라한 하숙집에서 살았습니다. 그는 이곳에서 시민들의 고민을 들어주었는데 사안의 경중을 떠나 시민들의 문제를 자신의 일처럼 여겼고 언제나 약자의 편에 서려고 노력했다고 합니다. 이런 노턴 1세의 인간적인 모습에 시민들은 절대적인 지지를 보내며 그를 황제로 추앙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매일 아침 자신의 애완견을 거느리고 거리로 나와 하수구 등의 청결상태를 살피고 시민의 안전을 점검했다고 합니다. 매주 종교적 화합을 위해 여러 종교의 예배에 참석하는 등 통치활동을 했습니다.
심지어 노턴은 황제의 품위 유지를 위해 돈이 필요하다는 이유로 자신의 이름을 새긴 화폐와 국채를 발행했고, 이 화폐는 샌프란시스코 전역에서 통용되었습니다. 그는 국채를 발행하면서 이 국채를 가지고 있으면 언젠가는 큰 돈을 벌게 될 것이라고 말했는데 50센트 국채에는 매년 7%의 이자가 붙을 것이라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오늘날 화폐 수집가들 사이에서는 꽤 인기있는 아이템으로 2012년에 50센트 국채는 18,400달러에 팔렸다고 합니다.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식당에서는 그에게 무료 식사를 제공하였고, 상점이나 식당에서는 그의 허락을 받아 입구에 기념패를 내걸기도 했습니다. 심지어 모든 극장들은 노턴 1세의 전용 특별석을 마련해 두었다고 합니다.
그는 황제를 위한 세금을 부과하기도 했는데 은행은 매주 3달러, 상점은 주당 25센트였습니다. 그런데 이 세금은 강제 징수가 아니었지만 놀랍게도 많은 시민들이 이를 착실히 납부했다고 합니다.
노턴 1세는 샌프란시스코의 모든 교통수단을 무료로 이용할 수 있었으나 센트럴퍼시픽 열차회사에서 그의 무임승차를 거부하자 황제는 이 회사에 영업 정지를 선고하였고 열차회사는 종신 무료 탑승권을 바치면서 사죄했다고 합니다.
그는 자신의 제복이 낡자 포고령을 내려 자신의 예복이 국가적인 수치라고 하였으며, 이에 시 위원회에서는 급히 황실 예복 비용을 마련해 그에게 최고급 맞춤옷을 지어 바쳤고 이에 노턴 1세는 매우 흡족해 하며 친서와 함께 위원 전원에게 귀족 작위를 내렸다고 합니다.
1867년 1월에 평소 노턴을 탐탁지 않게 생각했던 한 경찰이 그를 과대망상증 환자라며 경찰서에 구금했고 이에 분노한 시민 수백명에 황제의 석방을 요구하며 폭동을 일으켰습니다. 4일동안 계속된 폭동에 경찰서는 물론 샌프란시스코의 모든 업무가 마비될 지경에 이르자 결국 경찰은 노턴 1세를 풀어주었고 경찰서장과 시의회가 그에게 용서를 구하는 일까지 벌어졌습니다.
이후 노턴 1세의 존재는 샌프란시스코를 넘어 미국 전역에 알려졌고 이런 유명세 덕에 미국의 소설가 마크 트웨인과 빅토리아 여왕이 직접 그를 만나기도 하였습니다. 꽤나 친분이 있었던 마크 트웨인은 자신의 소설에 노턴을 모델로 한 등장인물을 넣기도 하였습니다.
1880년 1월, 강연을 하러가던 노턴은 길거리에서 쓰러져 심장마비로 사망하였습니다. 그의 장례는 샌프란시스코 시의회장으로 치러졌고 그의 장미빛 목관은 샌프란시스코 사업가협회에서 마련하였습니다. 모든 상점들은 문을 닫아 조의를 표했으며, 3만명이 넘는 조문객의 발길이 이어졌는데 장례행렬의 길이는 3km가 넘었다고 전해집니다. 샌프란시스코 외곽에 있는 그의 묘지에서는 매년 2월 14일 ‘노턴 1세의 날’ 행사가 열린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