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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황용동 절터서 통일신라 금동귀면 첫 출토

경주 황용동 황용사 절터서 통일신라 금동귀면 첫 출토

 불교문화재연구소는 문화재청과 함께 진행하는 사업의 일환으로 경주 황용사터에서 지난 7월 조사를 실시한 결과 탑 주변에서 국내 최초로 금동귀면을 찾았다고 합니다. 경북 경주 동쪽에 있는 황용동에 위치한 황용사(黃龍寺) 절터에서 금속판 일부를 도려내는 투조(透彫) 기법으로 만든 금동귀면이 출토된 것입니다.

출토된 금동귀면, 황용사, 경주, 동대봉산출토된 금동귀면(출처 : 연합뉴스, 불교문화재연구소)

 금동귀면은 높이가 15cm정도로 성인 손바닥 정도의 크기입니다. 입에는 고리가 달려있고 입체감이 살아있는 것이 특징입니다. 국내엣 유사한 사례가 없어 현재로서는 용도를 정확히 알 수 없다고 하네요. 단순한 장식품일수도 있고 고리에 무언가를 걸었던 것일 수도 있다고 합니다. 미술사학계에서는 조사 지역의 탑을 8-9세기 작품으로 보는데 금동귀면도 비슷한 시기에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합니다.

 또한 이 금동귀면의 뒷면에 임금 왕(王) 자가 새겨져 있어 당시 매우 융성한 사찰이었음이 확인되었습니다. 시대마다 왕실의 비호를 받거나 왕실에서 지원한 사찰임을 입증한 자료로 왕(王) 자가 새겨진 유물들이 출토되기도 하는데 금동귀면의 출토로 황용사도 통일신라시대 왕실의 지원을 받았을 가능성이 입증되었다고 합니다.

 불국사고금역대기(佛國寺古今歷代記)에 따르면 선덕여왕 2년(633)에 황둔사(黃芚寺)라는 이름으로 창건됐고, 소성왕(재위 799∼800) 때 황용사로 명칭이 바뀌었습니다. 중창을 거듭하는 과정에서 한자를 황용사(皇龍寺)로 쓰기도 했습니다. 이번에 발견된 기와에 ‘皇龍寺 大殿’이라고 적혀 있어서 이를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번에 출토된 용두 조각이 회암사지에서 출토된 용두 조각과 유사한 점으로 보아 이 절이 조선시대까지 이어져 왔음을 짐작할 수 있다고 합니다. 한편 쌍탑이 있는 곳에서 고려시대 흔적은 발견되지 않아 고려시대에는 다른 곳으로 절을 옮겼다가 조선시대에 중창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이 외에도 절터에서는 앞서 언급한 금동귀면, 명문기와, 용두 조각을 비롯하여 석불, 소조불, 하대석 조각, 막새기와, 분청사기 등 통일신라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의 유물이 나왔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불국사의 말사였던 황용사의 위상이 높았음을 알 수 있다고 합니다.

출토된 금동귀면, 황용사, 경주, 동대봉산조사 지역 전경(출처 : 연합뉴스, 불교문화재연구소)

 황용사는 경주 구황동에 있는 황룡사(皇龍寺)와는 다른 절로, 동대봉산(옛 은점산)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절터는 동대봉산 정상에서 남동쪽으로 내려오는 골짜기에 위치하며 동서로 주계곡이 절터를 감싸듯 흐르고 있습니다. 현재도 절터에서 100m 정도 떨어진 곳에 황용사라는 절이 운영되고 있다고 합니다.


- 관련 글 보기 :

[한국의 불가사의] - 황룡사 9층탑


- 관련 기사 보기 :

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8/09/04/0200000000AKR20180904087400005.HTML

http://www.newsis.com/view/?id=NISX20180906_000041168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