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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불가사의

개구리 소년 실종 사건

개구리 소년 실종 사건

 1991년 3월 26일, 30년만에 부활한 지방의회의원 선거일로 임시공휴일이었다. 오전 9시경, 성서국민학교(현재 성서초등학교)에 재학 중이던 김종식(당시 9세, 첫 번째 사진), 박찬인(당시 10세, 네 번째 사진), 김영규(당시 11세, 세 번째 사진), 조호연(당시 12세, 다섯 번째 사진), 우철원(당시 13세, 두 번째 사진) 다섯 어린이는 동네 인근의 와룡산(대구광역시 달서구 소재)에 개구리를 잡으러 간다고 떠난 뒤 실종되었다. 개구리를 잡으러 갔다가 실종되었다고 하여 "개구리 소년"으로 불린다.

개구리 소년

 사건 직후 경찰은 성서파출소에 수사본부를 설치, 연인원 20여만명의 경찰 병력을 투입하여 전국을 뒤졌고, 각종 전단지 2억장을 배포하는 등 최대의 수사력을 동원했으나 모두 허사였다. 몇 차례에 걸친 대통령의 특별지시와 현상금 4,200만원, 언론의 홍보도 별 도움이 되지 못했다. 실종 어린이의 가족들은 생업을 포기한 채 전국을 돌며 자식들을 찾았으나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경찰은 사건 발생 2~3일까지만 해도 어린이들이 마을 뒷산의 지리를 잘 알고 있다는 점과 평소 이들이 호기심과 모험심이 강했다는 점, 실종 당일 오후 인근 마을 주민이 어린이들이 산에서 내려오는 것을 목격했다는 제보 등에 근거해 집단 가출 사건으로 추정하고 변두리 만화가게, 전자 오락실 등을 집중 수색했다. 사건 발생 9일 동안 수색에 동원된 연인원은 3천명이 넘고 헬기도 두 차례나 수색을 했으나 실종 어린이들을 찾지 못했다.

 4월 22일, 실종 어린이의 부모들은 뒤늦게 그동안 자신들의 집에 거액을 요구하는 협박전화와 괴전화가 잇따라 걸려 온 사실을 털어 놓았다. 이에 따라 어린이들이 집단 유괴나 납치됐을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언론에 이 사실이 알려진 후 전화가 걸려오지 않은 점 등으로 미뤄 경찰에서는 장난전화일 것으로 보는 한편 충동에 의한 집단 가출 또는 불량배, 앵벌이 집단 등에 끌려가 감금되어 있을 가능성에 수사의 초점을 맞추었다. 경찰은 또한 인신 매매 집단에 납치되었을 가능성에 대비해 새우잡이 어선이나 외딴 섬, 해안 지역을 샅샅이 뒤졌다. 또 서울을 중심으로 우범지역을 이 잡듯이 뒤졌다.

 "돌아오라 개구리 소년"이라는 영화와 "개구리 소년"이라는 노래까지 만들어졌다. 상품 포장지에 이들을 찾는 광고도 실렸다. 언론의 적극적인 보도로 인해 한달 평균 50~60건 이상의 제보가 들어 왔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국민들의 관심도 줄어들고 제보 건수도 급격히 감소했다. 경찰도 수사전담요원을 축소하는 등 수사의지가 약해져 갔다.

개구리 소년 영화 포스터     개구리 소년 영화 포스터

(영화 포스터 - 출처 : 네이버 영화)

 결국 1993년 9월 23일, 실종사건 수사본부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어린이들을 찾는 수사를 종결짓기에 이르렀다. 제보와 신고 등 특수정보에 의존한 수사밖에는 별 도리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동안의 실종수사를 통해 경찰은 298명의 비행 가출 청소년을 귀가시켰으며, 가출 어린이들을 감금해 소매치기를 강요하거나 신문팔이, 껌팔이를 시켜 금품을 뜯은 사람들을 구속시키기도 했다.

 미궁에 빠진 이 사건에 대해 많은 유언비어가 나돌기도 했다. 신원을 밝히지 않은 한 40대 남자가 칠곡군 지천면 나환자촌(한센병 환자) 건물 지하실에 개구리 소년이 암매장되어 있다는 제보를 해온 것이었다. 이 이야기가 언론에 보도되면서 수사본부는 형사대를 급파하여 사실여부를 확인하려 했으나 나환자촌에서 출입을 거부하였다. 결국 법원으로부터 압수수색영장을 받아 수색에 나섰지만 암매장 용의점은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 나환자촌 주민들은 근거도 없는 제보를 언론에서 확인없이 보도해 마을이 회복할 수 없는 명예훼손을 당했다며 정정보도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1996년 1월 초, 하이텔에 올려진 글이 문제가 되었다. 글의 내용은 1995년 9월 10일 오후 4시 30분경, 정류장 앞 식당에서 군인 2명이 대화하는 것을 우연히 들었는데 실종된 소년들이 사실은 인근에 있던 제50사단(현재 대구광역시 북구로 이전)의 포사격 훈련 중 오발사고로 숨졌으며 이를 감추기 위해 암매장되었다는 것이었다. 이 게시물이 올려지자마자 조회 수가 폭증했고, 한 시민은 대구 달서 경찰서의 특수수사반으로 이 사실을 신고했다. 경찰은 즉시 게시물을 올린 부산의 김모 씨를 불러 수사에 착수했다. 김씨는 개구리 소년 사건이 잊혀져 가는 것 같아 이런 글을 올렸다는 어처구니없는 변명을 늘어 놓았다. 결국, 3개월만에 소문은 겨우 가라앉았다.

 UFO피랍설, 북한 납치설 등 여러 주장이 난무했지만 아이들의 흔적은 찾을 수가 없었다. 세월의 흐름 속에서 그들은 그렇게 잊혀지는 듯 했다. 그러나...

 2002년 9월 26일, 그들은 실종된지 11년 6개월만에 개구리를 잡으러 올라갔던 와룡산 기슭에서 참담한 유골로 발견되었다. 아무리 등잔 밑이 어둡다고 하지만 너무나 어처구니 없는 결과였다. 경찰에서 개구리 소년으로 추정되는 유골이 발견됐다는 연락을 받은 가족들은 와룡산 현장으로 오르는 내내 믿지 않으려다 끝내 울음을 터뜨렸다. 김영규 군의 아버지는 현장에서 발견된 청색 체육복을 들춰보다 실종되기 하루 전에 사준 운동복이라며 아들의 유골임을 인정했다.

 개구리 소년의 유골이 발견된 것은 그 날 오전 11시 30분경 와룡산 세방골에서 도토리를 줍던 주민에 의해서였다. 유골이 발견된 현장은 실종 어린이 5명이 살던 곳에서 3.5km정도 떨어진 산중턱 골짜기로 성산고교 신축공사장으로부터 100m가량 떨어진 곳이다. 최초 발견자인 최모 씨는 도토리를 줍다가 사람 뼈 비슷한 것이 파묻혀 있는 것이 보여 지팡이로 파 보니 유골과 신발이 나왔다고 밝혔다. 경찰은 반나절만에 현장을 훼손하면서 원시적인 방식으로 4구의 유골을 발굴해 버리는 어처구니 없는 실수를 저질렀다.

개구리 소년 유골 발견

 경찰은 저체온에 의한 사망에 무게를 두고 수사를 진행해 나갔다. 경찰은 어린이들이 산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 저체온과 굶주림으로 숨졌을 것으로 추정했다. 이들이 실종된 때가 아직 추운 3월이고 기온강하가 심한 산 속에서 헤매다 지쳐 정신과 기력을 잃고 끝내는 집단으로 사망했으리라는 것이다.

 저체온사란 체열이 방산되는 정도가 체내 열 생산보다 많아 체온을 점점 빼앗겨 죽게 되는 것을 말한다. 체온이 32도 이하로 내려갔을 때 생길 수 있는 것으로 동사와는 의미가 다르다. 이 때 호흡조절 기능의 마비로 일종의 환각증세를 일으켜 스스로 옷을 벗는 경우가 있다. 개구리 소년들의 경우 체육복 팔 부분에 매듭이 있는 점, 유골들이 바람과 비를 피할 수 있는 구덩이에서 엉켜 있는 모습 등이 그러한 가능성을 보여준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실종 당일 오후 6시경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했고 기온이 최저 3.3도로 쌀쌀했다는 기록도 그러한 정황을 뒷받침한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저체온사로 단정하기에는 무리라는 의견을 제시했다. 어린이라도 자기 보호본능이 있고 서로 껴안는 등의 방법으로 체온을 유지할 수 있었을 것이며 저체온증은 그렇게 쉽게 빠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 외에도 조난사라는 견해에 석연찮은 점이 많다. 유골이 발견된 곳은 마을에서 불과 300~500m 거리로 주민들도 늘 오르내리던 곳이며 실종 직후 수만명의 경찰 인력이 샅샅이 뒤졌는데 발견되지 않았을 리가 없다. 경찰이 당시에 깊은 산자락이라고 밝힌 것과 달리 현장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10여가구나 되는 서촌 마을이 있었고 바로 앞에는 구마고속도로가 밤에도 불을 환하게 밝힌 곳이다. 이 곳에서 초등학교 고학년인 이들이 길을 잃고 헤맸다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최초 발견자의 한 사람인 오모 씨는 유해 위에 큰 돌맹이가 놓여져 있었고 20~30cm의 흙까지 덮여 있어 누군가 의도적으로 시신을 은닉한 것으로 보인다는 견해를 밝혔다.

 유가족들은 유골에서 머리카락과 치아, 손발톱 등이 발견되지 않은 사실을 들어 타살 가능성을 제기하였다. 경북대 법의학팀은 발굴된 유골의 복원 작업을 벌이던 중 이러한 사실을 확인하였다. 치아가 온전히 보존된 사체는 단 1구도 없었다. 일반적으로 치아는 부패 속도가 느려 땅속에서는 수십년이 지나도 잘 썩지 않는다고 한다. 게다가 머리카락은 수천년이 지난 미라에서도 쉽게 발견된다는 점을 감안하면 의문이 아닐 수 없다. 따라서 소년들이 제 3의 장소에서 숨진 뒤 옮겨지는 과정에서 치아 등이 유실됐을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결국 경북대 법의학팀은 유골에서 발견된 두개골 파손 흔적을 근거로 타살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유해 5구 가운데 4구의 두개골에서 뚜렷한 손상 흔적이 나타났다. 경북대 법의학팀의 유골 감정보고에 따르면 상처가 거의 없는 조호연 군의 두개골과 심하게 파손된 박찬인 군의 두개골을 제외한 나머지 3개의 두개골에서 끔찍한 상처가 드러났다. 우철원 군은 좌우 옆 머리에 나 있는 직경 2~3cm가량의 구멍을 비롯해 그 주위로 직사각형 모양의 찍힌 자국이 10여개정도 있으며 모두 25군데 가량의 상처가 발견되었다. 김종식 군은 오른쪽 이마를 비롯해 직사각형 모양의 흉기 자국이 두개골 이곳 저곳에 남아 있으며 특히 왼쪽 팔목이 부러져 있는 것은 범인의 공격을 막으려다 생긴 골절일 것으로 판단했다. 김영규 군은 두개골이 무거운 돌에 오랫동안 눌려 있은 흔적과 흉기에 의한 상처가 오른쪽 옆머리에 2~3개 나 있다. 법의학팀은 태권도를 배우던 초등학교 고학년들이 이렇게 무참히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급박한 상황이었을 것으로 추정했다.

 또한 법의학팀의 조사 결과 두개골에서 이끼로 추정되는 물질이 발견되었다. 어린이들의 두개골 정수리 부근에만 이끼가 발견된 것은 흙에 묻힌 뒤 일부가 빗물 등에 씻겨 외부에 노출된 증거로 보고 있다. 특히 두개골에서 발견된 이끼류가 외부에 노출된 뒤 다시 흙에 덮힌 흔적이 없다는 견해를 보였다.

 유골 발견 당시 함께 발굴된 김영규 군의 체육복에는 매듭이 지어져 있었는데 하의 매듭은 보기 드문 독특한 형태였다. 상의 매듭은 태권도 허리띠 매기 방식이라는 결론이 났다. 소년들이 태권도를 배웠던 아이들이고 3명이 보이스카웃 대원인 점으로 미뤄 이러한 매듭은 충분히 가능할 것이라는 추측이다. 그러나 하의 매듭은 전문가들도 처음 보는 매듭이라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매듭이 쉽게 풀리도록 묶여 있는 것도 궁금증을 더한다. 옷의 매듭은 처음엔 눈을 가리고 못 움직이게 하려고 묶었으나 살해 후 사체 운반을 위해 쓰여졌을 것으로 추측된다.

 유골 발굴 장소와 부근 반경 150m안에서 모두 146개의 권총, 소총 등 다양한 종류의 총기 실탄과 탄두, 탄피 등이 발견되었다. 당시 주민들의 이야기에 따르면 동네 아이들은 개구리나 도롱뇽을 잡으러 산에 오르기도 했지만 탄피를 주우러 가기도 했다고 한다. 이에 따라 소년들이 탄피 등을 주운 것일 가능성도 있지만 사격장에서 날아온 유탄에 의해 숨졌을 가능성도 제기되었다. 다시 도마에 오른 것은 육군 제 50사단. 당시 현장에서 400~500m 떨어진 곳에 예비군 사격장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경찰은 실종 당시 지방 선거를 위한 임시 공휴일로 군이 사격훈련을 하지 않았다는 군 관계자의 진술을 확보하였으나 군부대 사격일지의 문서보관 기간이 1년으로 당시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사실인지는 확인할 수 없다고 밝혔다. 군 당국은 사선의 각도 등을 들어 유탄일 가능성은 적다며 반박하는 발표를 하기도 했다.

개구리 소년 유골 발견

 그리고 구두닦이를 했던 한모 씨는 유골이 발견된 며칠 후 2002년 7월 경에 30대 중반의 남자 1명이 구두를 닦으면서 군생활 당시 어린이 5명을 총으로 쏴 죽였다는 말을 했다고 경찰에 제보했다. 그는 사격 중 5명의 소년이 갑자기 나타나 2명이 총에 맞아 1명이 숨지고 1명이 크게 다쳤으며 이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5명 모두를 다른 곳으로 옮겨 목을 조르고 총으로 난사해 죽인 뒤 매장했다는 요지의 말을 했다고 한다. 경찰은 이 남자의 나이로 미루어 당시 군복무를 했을 가능성에 따라 인상착의 등을 파악하고 추가 조사를 벌였다. 그러나 한씨가 거액의 포상금을 노리고 제보를 했을 가능성도 있는 것으로 보고 수사를 병행했다. 사실 난사를 했다면 탄흔이 남아 있어야 하는데 유골 감식과정에서 그러한 증거는 나타나지 않았으며 사격은 보통 10~20명이 단체로 실시하는데 그러한 사실이 지금껏 묻혀있을 수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경찰은 법의학팀의 발표에 따라 타살 가능성에 중점을 두고 수사를 전개해 나갔다. 법의학팀의 감정 결과 사냥꾼과 정신이상자에 의해 살해됐을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경찰은 소년들이 살해된 후 암매장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범행 경위를 밝히고자 노력했다. 하지만 누가 왜 죽였는지는 여전히 의문으로 남는다.

 경찰은 소년들의 유골에 나타난 상처가 드라이버 등 예리한 흉기나 공기총 산탄에 의해 생겼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범행에 사용된 도구와 이러한 도구를 사용하는 사람을 파악하는데 주력했다. 범행 도구를 알아내는 것이 사건 해결의 핵심 열쇠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경찰은 호미 등 농기구로 돼지 머리를 가격하고 예리한 공구와 철사, 구리 등을 잘라 공기총으로 돼지머리와 나무 등에 관통 실험을 했으나 똑같은 형상을 찾는데 실패했다.

 총기 화약 전문가에 의하면 두개골에 발생한 홈의 크기가 시중에 유통되는 공기총 산탄 흔적과 비슷하지마 공기총탄은 절대로 뼈를 뚫지 못한다고 한다. 개조를 아무리 잘 해도 역시 마찬가지라고 하였다. 또 위력이 강한 엽총이었다면 발견된 것보다 훨씬 큰 골절이 생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경찰은 유골이 발견된 지역 주민들을 상대로 한 탐문 수사를 진행하여 동네 불량배 등 우범자, 약초 채취꾼, 등산객 등에 대해 다각적을 수사를 벌였으나 별 소득은 없었다.

 그리고 범인의 숫자와 관련하여 전문가들은 3명을 넘지 않을 것으로 추정했다. 경찰은 사건이 10년이상 은폐되기 위해서는 2명이 가장 적당한 범인의 수로 보고 있다. 초등학생 5~6명을 상대로 실험한 결과, 어른 1명이 흉기 등으로 위협을 하면 모든 어린이들이 도망을 가지 못한다는 사실이 확인됨에 따라 단독 범행을 포함, 다양한 가능성을 가지고 수사를 펼치게 되었다.

 유골이 발견되기 하루 전 문화일보는 와룡산에 개구리 소년 5명의 유골이 묻혀있으니 확인해 보라는 전화를 받았다. 경찰은 유골이 발견되기 하루 전에 전화가 걸려왔고 장소와 숫자 등이 구체적으로 언급된 점으로 미루어 사건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고 발신지 추적 등을 통해 40대로 추정되는 남자를 찾았으나 정신이상자로 판명되었다. (사실 좀 석연찮은 부분이 있긴 하다. 정신이상자가 정확한 장소를 밝힌다는 게...)

 한편 인근에 움막이 발견되기도 하였는데 이 구덩이는 비를 피하기 위해 윗 부분이 비닐 장판으로 덮여졌고 남쪽방향으로 통로가 나 있었으며 내부에서 플라스틱통과 가방 등이 발견되었다. 구덩이를 덮은 장판이 99년에 제조된 것으로 미뤄 이 구덩이가 그 이후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경찰은 이 움막에 거주했던 김모씨의 소재를 파악하는데 주력하여 사건과 연관성 여부를 수사하기도 했다.

 아직 경찰이 수사를 진행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최초 실종된 날부터 지금까지 밝혀진 것은 그들이 누군가에 의해 살해당했을 것이라는 추측 하나 뿐이다.


고 자료 : http://www.missingchild.or.kr

디지털 조선일보, 영남일보 기사(실종사건관련)

http://sookmyung.ac.kr/~fionav/frog.htm(폐쇄)

동아일보 기사, 엠파스 뉴스(유골발견관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