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의 거북선
거북선은 임진왜란 직전에 이순신(李舜臣) 장군의 고안으로 건조된 전선(戰船)이다. 1591년(선조 24년) 정읍현감 이순신은 전라좌수도 수군절도사로 부임하여 왜적의 침입에 대비해 거북선을 만들 것을 결심한다. 난중일기(亂中日記)에 따르면 거북선의 진수식을 가진 날은 임진년(壬辰年:1592) 3월 27일이며, 처음 해전에 참가한 것은 장계(狀啓)에서 “5월 29일 사천해전(泗川海戰)”이라 하였다.
현재 전해오는 문헌 중 '거북선'이라는 이름이 처음 나타나는 기록인 "조선왕조실록"에는 1413년(태종 13년) 5월 초에 "거북선이 싸우는 모습을 보았다"고 하였고, 2년 후에는 다시 "거북선이 매우 견고하여 적선이 해치지 못한다"고 되어 있으나 어떤 형태와 규모였는지에 대해서는 자세히 적혀 있지 않다. 대부분의 거북선에 대한 기록은 일반적인 외부 형태와 전투력에 관해서만 기록하고 있어서 실제 건조에 필요한 세부적인 수치에 대한 기록은 없다. 따라서 태종 때의 거북선과 "난중일기"에 드러난 거북선과의 관계도 확실히 알 수 없으나 임진왜란 때 거북선은 이순신의 고안에 의해 군관 나대용(羅大用) 등이 실제로 건조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순신 장군의 장계(狀啓)에는 "...앞에는 용머리를 달고 그 입으로 대포를 쏘게 되어 있고, 등에는 쇠못[鐵尖]을 꽂았으며, 안에서는 밖을 볼 수 있으나 밖에서는 안을 들여다 볼 수 없고, 비록 수백척의 적선 속이라도 쉽게 돌입 대포를 쏘게 되는데..."라고 하였다.
임진왜란 초기에 이 거북선은 불과 3척 정도 건조되었으나 전란 중에 얼마나 더 건조되었는지 확실치 않으며 칠천량(漆川梁)에서 조선수군이 패전할 때 거의 상실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임진왜란 이후에 거북선에 대한 기술적 전승이 이루어지지 못하면서 시대에 따라 여러 형태로 조선말까지 각 수영(水營)에 존재하였다.
거북선이 이순신 장군에 의해 갑자기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거북선은 신라시대의 조선기술, 뱃전에 창칼을 꽂아 적의 접근을 막았던 고려시대의 검선(劍船), 고려시대에 발달한 화포기술, 조선시대에 개발된 전투선인 판옥선(板屋船) 등의 기술이 종합되어 창조된 것이다. 충무공의 거북선 180년 전에 이미 거북선에 대한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순신은 이전의 거북선에다 새로운 기술을 가미하여 거북선을 완성한 것으로 보인다.
거북선의 형태와 구조에 대한 비교적 자세한 기록은 임진왜란 후 200년을 넘긴 1795년(정조 19년)에 편찬된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에서 찾아볼 수 있다. 거북선은 '전라좌수영 거북선'과 '통제영 거북선'의 두 가지 형태가 있었는데 통제영 거북선에 비해 전라좌수영 거북선은 거북 머리 아래 귀신머리가 하나 더 붙어 있고 포구멍의 위치와 수에 차이가 있다.
이분(李芬)의 "충무공행록(忠武公行錄)"에는 "크기는 판옥선(板屋船)과 같고, 위에는 판자로 덮었다. 판상에는 좁은 십자로(十字路)를 만들어 사람이 다닐 수 있도록 하고, 그 외에는 모두 도추(刀錐)를 꽂아서 사방에 발을 붙일 수 없도록 하였다. 앞에는 용머리를 만들어 그 아가리가 총구멍[銃穴]이 되게 하고, 뒤에는 거북의 꼬리[龜尾]를 만들어 붙이고 그 꼬리 아래 총구멍을 내었다. 좌우에 각각 6문의 총구멍을 내었는데, 그 전체의 모습이 대략 거북과 같으므로 그 이름을 거북선이라 하였다..."라고 거북선에 대하여 묘사하고 있다.
거북선은 두께가 12cm이상의 튼튼한 소나무로 만들어졌으며 비중은 약 0.73이었다. 당시 다른 배에는 비중이 0.41-0.47정도인 목재가 사용되었음을 감안하면 상당히 강도가 높았다. 바닷물 속에서 녹이 슬지 않는 나무못을 사용하여 충격에 강한 면모를 보였다. 이같은 장점으로 인해 거북선은 상대 전함을 부딪혀 침몰시키는 저돌적인 전술을 사용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배밑은 64자 8치, 머리쪽 너비는 12자, 허리의 너비는 14자 5치, 꼬리쪽 너비는 10자 6치였다. 임진왜란 때 거북선의 승조원은 130여명이었으며 그 중 45명은 전투요원이었다. 이순신의 장계에 기록된 항해시간과 거리를 검토해보면 약 6kn 정도의 속력을 낼 수 있었다. 거북선의 노는 양쪽에 8개씩 총 16척이 있었으며 80명의 노군이 담당하였고 각 노에는 1명의 조장과 4명의 노군이 배속되어 있었다. 평상시에는 노 하나에 노군 2명이 교대로 노를 저었으며 전투시에는 노 양쪽에 2명씩 4명 전원이 전력을 다하여 노를 저였다. 선체 밖으로 노가 나와 있는 경우 상대의 배와 충돌하면 노가 부러져 사용할 수 없게 된다. 거북선의 노는 선체 안쪽으로 배치되어 있어서 충돌시에도 동요되지 앟고 노를 저을 수 있었다. 거북선은 노와 돛을 혼용하였다. 주로 먼 곳을 항해할 때는 돛을 사용하였으며, 돛대는 뉘었다 세웠다 할 수 있었다.
통제영 거북선의 경우 거북등에 좌우 각각 12문씩 총 24문의 총포혈이 배치되었고 그 아래 방패판에는 좌우 각각 22문, 선수부 용머리 위에 2문, 용머리 아래 2문, 선체 부분인 좌우 현판에도 각 1문의 현자포혈 등 총 74개의 총포혈이 있었다. 한편 통제영보다 한급 아래인 좌수영에 배치된 거북선의 경우 거북등에 좌우 6문, 그 아래 방패판에 좌우 10문, 거북머리 아래 좌우 2문 등 총 34개의 포문이 있었다. 임진왜란 때의 거북선에 대한 기록을 보면 거북선 전후좌우 모두 각각 6문씩 총 24개의 총포혈이 있었다. 이는 거북선에 탑승하는 포수의 숫자와도 맞아 떨어진다.
거북선은 파괴력이 크고 사정거리가 긴 천(天), 지(地), 현(玄), 황(黃), 포(砲) 등으로 무장하였다. 천자포는 직경 11.7cm의 둥근 철환을 발사하는 대포였는데 이 포의 사정거리는 500m가 넘었다. 지자포는 천자포보다 약간 작은 포탄을 쏘았으며 사정거리가 350m를 넘었다. 거북선은 상대의 사정거리 밖에서 천자포와 지자포를 이용하여 마음대로 포탄공격을 하였다. 현자포와 황자포도 사정가리가 300m정도되었다.
거북선이 과연 철갑선이었는지는 아직까지 논란의 대상이다. 거북선이 철갑선이라는 말은 일본 기록에 많다. 임진왜란 이후 일본의 수군장이 된 구끼의 기록에 의하면 조선의 전함은 거북선 이외에도 모두 철로 감싼 전함이 많이 있다고 했다. 이외에 많은 일본 기록에서 거북선이 철갑선이라고 한다. 그러나 우리나라 기록에 거북선이 철로 장갑되어 있다는 기록은 없다. 이순신의 장계나 난중일기에도 칼 송곳을 꽂았다고는 되어 있으나 철로 덮었다는 기록은 없으며 조카 이분의 '충무공행록'에도 나무로 뚜껑을 씌우고 칼을 꽂아 적이 뛰어들 수 없게 했다고만 되어 있다. 이 때문에 학계에서는 거북선이 철갑선은 아닐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우리가 흔히 접하는 거북선의 복원 모형도 제대로 된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권위적인 기관에서 만든 모형조차 통제영 거북선과 전라좌수영 거북선을 적당히 조합하여 만든 것이 대부분이다. 임진왜란과 충무공행록 등의 기록이 쓰여진 것은 수세기나 차이나며 그 동안 거북선의 구조가 바뀔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기록 내용 그대로 복원 모형을 만드는 것은 큰 모순이다. 기존 거북선 모형은 "전라좌수영 귀선도"를 본떠 "총통화기(銃筒火器)"를 쏠 때 거북선 좌우 현판에 있는 '옛 이응(ㅇ)' 모양의 혈(穴, 구멍)에 총신을 넣었으리라고 추정한다. 그러나 포혈일 경우 원거리 사격시 포신이 구멍에 꼭 끼는 바람에 발사각도를 조절할 수 없다는 한계가 있다. 따라서 포혈이 아닌 장방형 포문이 그려져 있는 "통제영 귀선도"를 모델로 삼아야 한다. 그러나 문을 통해 포를 쏘려면 기동력을 생명으로 하는 거북선이 포 때문에 노를 젓지 못하는 일이 발생할 수 있다. 그래서 거북선이 2층 구조가 아닌 노를 젓는 곳과 포를 쏘는 곳이 분리된 3층 구조일 것으로 추정하는 사람들도 있다.
현재 각종 모형에 제시된 바와 같이 거북선의 용머리가 길게 위로 솟아 올라 있었는지도 의문이다. 용머리에서 대포를 쏘았다는 기록이 있는데 정조 때 발간된 "이충무공전서"에 나오는 용머리의 크기(길이 133cm, 폭 93cm)로는 포를 설치하기에는 좀 작아 보인다. 이순신의 장계나 난중일기에는 용의 입으로 현자포를 치켜 쏜다고 되어 있으며 왜장을 사살한 전공도 기록되어 있다. 그러므로 임진란 당시 거북선의 용머리는 현재 모형보다 크고 거북선 선수부에 밀착되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충무공전서에는 거북머리에서 유황연기를 뿜어 적을 혼미케 한다는 기록이 있는데 용머리의 기능이 포탑에서 연기 방출용 굴뚝으로 바뀐 것이 언제인지도 알 수 없다. 게다가 내부의 밀폐된 공간에서 수십개의 포를 발사하여 발생한 엄청난 양의 연기를 어떻게 처리하였는지도 의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