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사시대의 무덤, 고인돌(Dolmen)
고인돌. 흔히 청동기나 초기 철기 시대에 경제력이나 정치 권력을 가지 자의 무덤으로 보고 있다. 제단으로 사용되었다는 설도 있다. 현재 축조 시기와 기원, 목적 등이 확실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 웅장하고 거대한 고인돌의 불가사의한 축조는 사람들에게 많은 의구심을 갖게 한다. 고인돌은 큰돌을 받치고 있는 괸돌 또는 고임돌에서 유래된 명칭이다. 민간에서도 고엔돌, 굄돌, 되무덤, 도무덤 등으로 불린다. 일본에서는 고인돌을 지석묘(支石墓)라 하며(우리나라에서도 한자로는 지석묘라 씀) 중국에서는 돌로 만든 집이란 의미로 석붕(石棚)이라 한다. 켈트어로는 탁자란 뜻의 Dol과 돌이란 의미인 Men의 합성어로 돌멘(Dolmen)이라 하고 영어로는 Table Stone이라 한다. 이는 고인돌이 외형상 탁자 모양을 한 것에서 유래한 것이다. 오늘날에는 거석이란 의미로 Megalith가 보편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고인돌은 북유럽, 서유럽, 지중해, 인도, 동남아시아, 동북아시아 등 거의 세계 전역에 분포하며 그 분포 지역은 바다에 인접한 곳에 밀집해 있다. 전세계 고인돌 7만여기 중 절반이 넘는 4만여기가 한반도에 존재한다고 한다. 남한에 3만여기, 북한에 1만여기가 분포하는 것으로 확인되어 있으며 일부 학자들은 그 수를 7~8만기까지 늘려 잡기도 한다.
우리나라 고인돌 축조 시기는 신석기시대 축조설과 청동기시대 축조설 등이 있다. 신석기시대 축조설은 거석문화가 신석기시대부터 등장했으며, 씨족 공동무덤의 성격을 띠고 있는 점과 고인돌 주변에서 뗀석기와 빗살무늬토기 조각 등이 출토된 점을 들고 있다. 청동기시대설은 기원전 2000년대 말과 1000년대 초기, 중기설이 있다. 기원전 2000년대 말은 중국 요령지방의 고인돌 연대와 비교하는 설이며, 기원전 1000년 초는 방사성탄소 연대를 참고하여 우리나라 청동기 문화의 형성과 관련한 주장이다. 기원전 1000년대 중기설은 1960년대 초까지 탁자식 고인돌의 연대로 제시된 것이다.
고인돌의 덮개돌은 보통 10톤 미만이지만 대형의 고인돌은 20~40톤에 이르며, 100톤 이상되는 초대형도 있다. 그래서 고인돌 축조에 가장 어렵고 중요한 작업이 덮개돌의 채석과 운반이다. 덮개돌은 주변 산에 있는 바위나 암벽에서 떼어낸 바위를 이용했는데, 덮개돌의 측면에 일정한 간격을 두고 구멍 자국이 있는 것으로 보아 바위 틈이나 암석의 결을 이용해 떼어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떼어낸 돌을 옮기는데 30톤을 기준으로 약 200여명이 통나무와 밧줄로 옮겨야 했다. 한 사람당 100kg가까이를 들어야 한다는 얘기가 된다. 이 덮개돌은 지하의 무덤방 또는 받침돌에 흙을 경사지게 돋운 후 위로 끌어올려 흙을 제거했다고 추정된다. 이렇게 거대한 고인돌을 축조할 만큼의 인력 동원은 유목 사회보다는 농경사회에서 가능했을 것이다.
고인돌에서 출토된 인골을 보면 하나의 무덤방에 한사람만을 묻은 것이 보통이지만, 한쪽 단벽의 개폐가 쉬운 북방식 고인돌의 경우는 무덤방 안을 몇 개의 칸막이로 막은 공간에 인골이 흩어져 있어 여러 사람을 묻은 특수한 예이다. 서유럽의 고인돌은 여러 사람을 매장하는 공동묘가 대부분이며, 중국 요령성에는 바로 펴묻기와 굽혀 묻기가 많으나 한 무덤방 안에 여러 명의 시신을 화장한 예도 있다(** 참조).
고인돌의 형태는 지역에 따라 조금씩 다른데 그 이유는 각 지역마다 독자적인 전통과 문화 속에서 고인돌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한국이 고인돌은 형태에 따라 북방식과 남방식 그리고 개석식으로 구분된다. 북방식은 판석 4~5개를 세워 돌방을 만들고 그 위에 덮개돌을 얹어 묘실이 지상에 나와 있는데 책상을 닮았다 하여 탁자식으로도 부른다. 남방식 고인돌은 판석을 세우거나 돌무지로 만든 무덤방을 지하에 만들고 그 주위로 받침돌을 놓은 후 덮개돌로 덮은 것으로, 바둑판 모양이라 기반식이라고도 부른다. 덮개돌이 거대하고 괴석상을 한 것은 호남과 영남 지역에서만 보이며 무덤방이 없는 것이 많다. 개석식(蓋石式) 고인돌은 지하에 만든 무덤방 위에 받침돌없이 바로 덮개돌을 얹은 형식으로 지석이 없는 남방식 고인돌로 분류하여 무지석식이라고도 한다. 위의 세가지 형태 이외에 제주지역에서만 나타나는 독특한 구조의 제주식 고인돌이 있다. 이 형태는 무덤방이 지상에 노출되어 있는데 여러 장의 판석이 덮개돌 가장자리를 따라 돌려 세워진 형태이다.
고인돌의 덮개돌 아래 하부구조는 받침돌, 묘역시설, 뚜껑돌, 무덤방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받침돌은 덮개돌을 받치고 있으면서 하부구조가 파괴되는 것을 방지해 주고 덮개돌을 더 웅장하게 돋보이도록 하는 역할을 한다. 이는 기반식 고인돌의 기본요소이다. 기둥식 받침돌은 높이가 50cm이상으로 3~6개가 있지만 기본은 4개이다. 묘역시설은 무덤방 주위에 직사각형이나 타원형 또는 원형으로 납작한 돌을 깔거나 깬돌을 쌓은 것이다. 이는 무덤의 영역을 구획한 것으로 매장주체부인 무덤방을 무거운 덮개돌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시설이다. 뚜껑돌은 직사각형의 무덤방을 덮은 판상석같은 돌을 말한다. 무덤방은 죽은이가 직접 안치되는 매장주체부를 이루기 때문에 가장 정성들여 만들었다.
고인돌에서는 무기류, 토기류, 장신구류 등 무덤방안에 시신과 함께 넣어둔 부장용 유물이 출토된다. 가장 많이 발견되는 것은 무기류인 간돌검과 간돌화살촉이다. 또 장례를 지낼 때 쓰였던 의례용 유물들도 발견된다. 이러한 유물들은 죽은 자의 지위와 권위를 상징하고 재생과 부활의 의미를 가지며 당시의 내세관과 조영관을 반영한 것이다.
고인돌에는 직경 5~10cm정도에 깊이 3~5cm내외의 반원형의 홈이 많이 발견된다. 이를 성혈(性穴)이라 한다. 우리나라 고인돌에는 이런 성혈이 전국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성혈은 천둥 경외의 표현, 불씨를 만드는 데서 생긴 것, 태양 숭배사상의 표현, 풍요와 다산의 의미, 장례 예술의 표현, 장례의식, 장식적 의미 등 여러 가지로 해석되고 있다. 고인돌 당시가 아니라 후대에 새겨졌을 가능성도 제기되었다. 고인돌에는 이런 성혈 외에도 암각화가 많이 발견된다. 간돌검과 이를 받들어 모시는 사람 모습, 창에 찔린 동물, 그 외의 여러 형상이 전면에 새겨져 있다. 기하학적인 동심원 문양이 나타나는 것도 있다.
우리나라의 고인돌의 기원에 대해서 크게 3가지 설이 있다. 그 중 하나는 독자적으로 발생했다는 것인데 주변의 고인돌보다 시기적으로 앞서고, 우리나라에 가장 밀집 분포하고 형식도 다양하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남쪽에서 들어 왔다는 설인데 동남아시아로부터 해로를 통해 중국 동북해안 지방과 한반도에 전파되었다는 것이다. 마지막 하나는 고인돌이 북방의 청동기 문화와 밀접한 관련을 보이고 있기 때문에 북쪽에서 전해졌다는 주장이다. 고인돌은 농경문화, 세골장 풍습, 난생설화 등 남방문화의 요소와 비파형 동검같은 청동기 유물인 북방문화의 요소가 섞여서 나타나고 있다. 이런 점을 미루어 볼 때 우리나라의 고인돌은 남북의 문화를 융합한 독자적인 문화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고인돌은 무덤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충북 제원 황석리에서 완전한 사람뼈가 보고되면서 19세기에 제기된 이 주장이 거의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졌던 것이다. 그러나 고인돌은 무덤뿐만 아니라 다른 기능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먼저 고인돌이 사회의 협동과 결속력을 다지기 위한 상징적 기념물로써 거족적인 행사의 일환으로 건립되었다는 것이다. 고인돌 묘역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1기 또는 2기만 독립되어 있는 것들이 발견되는데 이것이 바로 제단으로 사용된 고인돌로 추정된다. 또한 고인돌은 묘표석으로의 기능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묘역을 상징하는 기념물 내지는 권위와 위용을 드러내기 위한 것 또는 묘역을 표시하는 단순한 기능으로 추정된다.
고인돌에 묻힌 사람의 신분을 밝히는 일은 매우 어렵다. 우리나라 고인돌은 지역에 따라 형태나 밀집도가 다르고 그에 따라 무덤의 군집성이나 형태가 다양하기 때문에 여러 주장들이 나오게 되는 것이다. 고인돌의 주인공은 일반적으로 그 사회의 지배자로 보고 있다. 고인돌을 축조하려면 많은 인력을 동원할 수 있는 정치적인 힘을 가져야 하고 이에 동원된 사람들에게 음식물 등을 보상할 수 있는 경제적인 부가 바탕이 되어야 한다. 이러한 형태상 일반인들이 고인돌을 가질 수는 없었을 것이라고 추측된다. 고인돌이 무리지어 있어 혈연을 기반으로 한 지배자와 그 가족의 무덤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그렇다면 이렇게 융성하던 고인돌이 소멸한 이유는 무엇일까? 고인돌이 소멸하기 시작한 연대는 청동기시대 중기말설, 후기설, 기원후설 등이 있다. 무덤이란 전통성과 보수성이 아주 강한데 대대로 내려온 무덤 방식을 버리고 새로운 무덤을 쓰는 것은 큰 모험이 아닐 수 없다. 이에는 커다란 사회적 변화나 정치적인 힘이 없으면 안 된다. 고인돌 후기에는 경작지 확보를 위한 전쟁으로 사람들의 신분이 달라지면서 수장층이 등장하게 된다. 그리고 선진문화인 철기문화가 등장하게 되면서 철제 농기구를 사용하여 작업의 능률을 올릴 수 있었다. 이런 과정에서 고인돌 축조는 낭비이고 소모적인 일이었을 것이다. 고인돌 축조에 동원된 인력이 생산활동에 투입되는 과정에서 많은 인력이 필요없는 무덤구조로 변화되었을 것이다.
전라북도의 고창군은 고인돌군이 발견되는 곳이다. 고창군은 한반도는 물론 동북아시아에서 가장 조밀한 고인돌의 분포지역으로 그 수는 대략 2,000여기가 된다고 한다. 고창지역에는 남방식과 북방식 고인돌이 섞여 있다. 그래서 고인돌의 형식 변천 과정을 한눈에 조명할 수 있고 바둑판식 거석화가 이루어진 곳으로 다방면에서 보존가치가 뛰어나다고 한다. 이 곳 고창의 고인돌을 포함해 화순, 강화 고인돌 유적이 2000년 11월 29일에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2000년 12월 2일,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WHC)는 이 고인돌군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했다.
고인돌은 그 동안 우리나라에서 보존가치를 인정받지 못했다. 구한 말과 일제시대 고인돌은 마을의 신작로를 내거나 저수지를 만드는데 마구 동원되었다고 한다. 또 국토 개발 시에도 각종 토목 공사로 인해 고인돌은 중장비에 의해 쪼개지고 물 속에 잠기는 수모를 당했다. 그 수가 수만 기에 달할 것이라고 지적한다. 하지만 이렇게 고인돌의 연구가 본격화된 것은 그 국토개발 덕분이라 한다. 1970년대에 들면서 전국적으로 댐을 건설하였는데 수몰지역별로 긴급 구제 발굴이 이루어진 것이다. 앞으로는 고인돌 유적지를 보존 관리하는데 힘을 쏟아야 할 것이다.
** 시신의 매장에는 펴묻기, 굽혀묻기, 두벌묻기, 불태워묻기 등이 있다. 펴묻기는 바로 누워있는 자세로 매장하는 방법으로 가장 기본적인 매장법이다. 굽혀묻기는 팔이나 다리를 굽힌 자세로 묻는 방법으로 청동기시대 돌널무덤에서 특히 유행한 장법이다. 두벌묻기는 살을 부패시켜 육탈 과정을 거친 후 뼈만 추려 다시 매장하는 방법이다. 불태워묻기(화장, 火葬)는 시신을 불사르고 잔존한 뼈만 매장하는 방법이다.
참고 자료 : 고인돌 이야기(2001년, 이영문 지음, 다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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