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한국의 불가사의

황룡사 9층탑

황룡사 9층탑

 553년(진흥왕 14년) 2월에 월성(月城) 동쪽에 새로운 궁궐을 짓게 하였으나 그 곳에서 황룡(黃龍)이 나타났다는 말을 듣고 사찰로 고쳐 짓게 하고 절 이름을 황룡사(皇龍寺)라 하였다는 기록이 전한다. 569년에 돌담장을 두르고 경역(境域)을 마련하여 일단 사찰의 건물배치가 완료되었다. 그 뒤 574년에 6장이 넘는 주존불을 비롯하여 금동삼존불을 만들고, 이 삼존불을 모시기 위한 금당을 584년에 세웠다.

황룡사 9층탑(황룡사, 국립경주박물관, ⓒ미스터리움)

 황룡사는 동으로는 명활산(明活山), 서로는 선도산(仙桃山), 북으로는 금강산(金剛山), 남으로는 남산(南山)을 서로 연결했을 때 교차되는 지점에 위치해 있으며 담장 내부의 면적만 약 24,700평에 달한다. 또한 이 곳이 늪지였으므로 기존의 토지를 징발할 필요가 없었다. 황룡사의 가람 배치는 남쪽에서부터 남문, 중문, 구층탑, 금당 그리고 강당이 중심을 차지하고 그 외곽으로 회랑이 있으며 기존의 사찰과는 다른 1탑 3금당의 형식을 가지게 되었다. 평지 가람으로서의 편안함을 느낄 수 있도록 남문 3칸, 중문 5칸, 목탑 7칸, 금당 9칸, 강당 11칸으로 점점 늘어나는 방식을 사용하였다. 그리고 황룡사에는 거대한 종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삼국유사에는 "신라 경덕왕 13년(754년)에 황룡사에 종을 만드니 길이가 1장 3촌이고 두께가 9촌이며 무게가 497,581근이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는 황동 12만근이 소요된 성덕대왕신종(에밀레종)의 4배가 넘는 크기이다. 이 종은 몽고의 침략군이 탐을 낸 나머지 동해(지금의 감포, 대종천 부근)까지 옮겨와서는 배에 끌어올렸으나 그 무게 때문에 배가 전복하여 바다 속으로 가라앉았다고 한다. 그 일이 있은 후부터 문무왕 해중릉이 있는 감은사 부근의 개울을 대종천(大鐘川)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황룡사 9층탑, 목탑터(황룡사 목탑터, ⓒ미스터리움)

 황룡사 9층탑은 643년(선덕여왕 12년)에 당나라에서 유학을 하고 귀국한 자장(慈藏)의 요청으로 건조되었다고 한다. 당나라에 있을 때 자장은 한 신인을 만났다. '우리나라는 북으로는 말갈, 남으로는 왜국과 인접해 있으며 고구려와 백제가 번갈아 침입하니 이런 이웃 나라의 횡포로 백성들이 고통받고 있다'고 신라가 처한 어려움을 호소하자 그는 '지금 그대의 나라는 여왕을 섬기고 있소. 여자가 임금이니 덕은 있으나 위엄이 없으므로 이웃 나라들이 넘보는 것이오. 지금 본국에 돌아가 황룡사 안에 9층탑을 세우도록 하시오. 그러면 이웃 나라들이 모두 항복하고 동방의 아홉 나라가 조공해 올 것이며 나라가 길이 평안하리라'하였다. 이에 자장은 귀국하자마자 왕에게 탑의 건립을 건의하게 된 것이었다.

 백제가 목조 건축술이 발달되어 있던 터라 신라 조정의 초청으로 백제의 장인 아비지(阿非知)가 설계와 건축을 맡아 2년만에 탑을 완성하였다. 삼국유사 제3권 "황룡사 9층탑"편을 보면 아비지가 200명의 장인을 거느리고 공사를 하는 기록이 있다. 처음 절의 기둥을 세우던 날, 아비지의 꿈에 백제가 멸망하는 것이 보였다. 이에 의심이 난 아비지가 일을 멈추자 문득 천지가 진동하며 어두워지더니 노승과 장사가 나타나 그 기둥을 세우고 사라졌다고 한다. 이에 아비지는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고 탑을 완성하였다고 한다.

 완성된 탑의 높이는 철반(鐵盤) 이상의 높이가 42척(1척은 약 30cm), 그 이하 본탑의 높이가 183척으로 약 80m에 달했다고 한다. 이 탑은 신라 국민들의 정신적인 단합과 무장을 통해 전쟁에서 승리하여 신라의 이름 아래 한민족이 통일되기를 부처에게 빌기 위한 것이었다. 당시 신라인들은 아침저녁으로 이 탑을 바라보면서 그러한 염원을 빌었을 것이다. 아울러 자신과 가족의 안녕과 평화를 빌었을 것이다.

황룡사 9층탑, 발굴 배치도

 탑의 각 층은 이웃 나라를 상징했다.1층은 일본, 2층은 중화, 3층은 오월, 4층은 탐라, 5층은 응유, 6층은 말갈, 7층은 계단, 8층은 여적, 9층은 예맥을 상징한다. 자장이 만난 신인에 의하면 황룡사에 9층탑을 세우면 이웃 나라의 침입을 막고 그들의 항복을 받을 수 있다고 하였다. 그래서 일까? 탑을 완성한지 23년만에 신라는 삼국을 통일한다.

 이 탑은 신라 삼보(三寶)의 하나로 높이 받들어졌고 훗날 신라가 멸망하고 고려시대에도 역시 소중하게 여겨졌다. 태조 왕건은 이 탑을 누구보다 소중히 여겼고 이를 모방해 서경(西京, 평양)에 9층탑을 세우기도 하였다.

 황룡사 9층탑은 건립된지 50년이 지난 698년(효소왕 7년), 벼락을 맞아 불탄 이래 5차례의 중수를 거듭하여 웅장한 모습을 유지해 왔다. 경문왕 12년에는 탑이 동북으로 기울어져 옛것을 헐고 새로 지었다. 경애왕 4년(927년)에 탑이 북쪽으로 기울어졌고, 고려 광종 5년(954년)에 재앙을 입어 현종 3년(1012년)에 경주의 조유궁(朝游宮)을 헐어 그 재료로 탑을 수리하였다. 현종 13년(1022년)에 탑을 세 번째로 중수하였고, 정종 2년(1036년)에 낙뢰로 파손된 것을 문종 18년에 네 번째로 중수하였다. 헌종 원년(1094년)에 벼락을 맞아 수리하였으며, 예종 원년(1105년)에 황룡사 낙성을 보게 했다는 기록이 있어 이 해에 대대적인 수리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고종 25년(1238년)에 몽고군의 칩입으로 황룡사가 불타 버렸을 때 함께 소실되었다.

황룡사 9층탑, 복원 모형(9층탑 1/10 복원 모형, 황룡사역사문화관, ⓒ미스터리움)

 일제시대에는 일본학자들에 의해 황룡사지의 중요성이 인정되어 문헌조사와 아울러 지표관찰을 통한 조사가 이루어졌고 소극적이나마 보호대책도 마련되었다. 광복 후 1962년 1월 21일, 문교부에서 황룡사지를 사적 제 6호로 지정하게 되었고 1969년에는 강당지 일부를 대상으로 발굴조사가 이루어졌으나 충분한 성과를 얻지 못하였다. 1971년에 마련된 정부의 "경주 관광 종합 개발 계획" 속에 황룡사지 발굴조사가 포함됨에 따라 문화재 관리국 문화재 연구소 경주 고적 발굴 조사단이 6월부터 발굴 조사에 착수하여 1983년 12월까지 13년동안 조사를 진행시켰다.

 1970년대에 들어서 본격적인 조사가 이루어졌다. 이 때 건물의 배치나 비교적 정확한 황룡사의 크기 등이 알려지게 되었다. 발굴 조사 결과 동서로 288m, 남북 281m인 것으로 확인되었다. 또한 강당의 좌우에도 독립된 건물을 배치하였음이 밝혀졌고, 동서남북으로 마련된 회랑이 서로 연결되지 않고 독립된 상태였음도 확인되었다. 이로써 황룡사의 가람배치가 일본학자에 의해 알려진 장방형 배치에서 정방형에 가까운 독특한 형태임을 알게 되었다. 이밖에도 황룡사가 그 규모에 있어서 동양 최대의 사찰이었음이 밝혀졌고 황룡사 9층탑의 존재도 분명히 밝히게 되었다. 출토된 유물은 무려 4만여점에 달하였다. 그리고 높이 182cm, 최대 너비 105cm인 대형의 치미는 일본이나 중국에서도 아직까지 발견된 예가 없어 동양 최대의 치미라 할 수 있으며 아울러 이러한 치미가 사용된 건물의 웅장함을 짐작할 수 있다.

황룡사 9층탑, 당간지주(황룡사 당간지주, ⓒ미스터리움)

 황룡사지 발굴은 연중무휴로 8년간 지속된 기록을 세웠고 나아가 건물지 발굴조사의 표본이 된 사업이었다. 또한 30톤에 달하는 심초석(心礎石)을 안전하게 옮기기 위해 당시 우리나라에 3대에 불과한 100톤 크레인이 동원되기도 하였으며 발굴로 인해 민가 100여동이 없어지기도 하였다.

 황룡사 9층탑은 우리나라 최초의 목탑 양식을 알 수 있게 해 주며, 황룡사는 신라 호국 불교 사상의 구심체였다. 지금은 허허벌판에 남은 몇 개의 주춧돌들이 웅장했던 황룡사와 9층탑을 대신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