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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자료

바다의 후예, 바이킹(Viking)

바다의 후예, 바이킹(Viking)

 바이킹은 일찍이 덴마크 북부에서 노르웨이, 스웨덴 남부에 걸친 북유럽 스칸디나비아 반도에 정착한 게르만의 일파인 노르만족(북게르만족)이다. 원래는 스칸디나비아에서 덴마크에 걸쳐 많이 있는 "vik(峽江)"에서 유래한 말로 "협강에서 온 자"란 뜻이다. vig(전투) , wik(성채화된 숙영지), viking(해적) 등에서 유래하였다는 설도 있으나 정설은 없다.

 이들은 8세기 말에서 11세기 초에 해상으로부터 유럽과 러시아 등에 침입하였다. 이들은 처음에는 단순한 약탈에 그쳤으나 점점 대담해져 급기야 그 곳에 정착하기까지 이른다. 이들은 성직자들을 마구잡이로 죽였으며 교회의 소유물도 주저하지 않고 약탈하였다. 이러한 모습으로 인해 그들은 지옥에서 온 악마에 비유되었다.

바다의 후예, 바이킹(Viking)

 바이킹은 9세기 중엽에 남하하여 독일과 프랑스 일대를 유린하고 한 때는 파리를 점령하였다. 857년에는 지중해에 침입하여 에스파니아, 프랑스의 노르망디, 이탈리아의 시실리, 코르시카, 아프리카, 살지니아 등지를 횡행하고 동쪽으로 나아가 그리스의 에게해 제도와 소아시아 연안에도 출몰하여 약탈을 자행하였다. 그들은 북방에도 탐험하여 860년에는 아이슬란드를 식민지로 삼았고 983년경에는 아이슬란드에 있던 노르만들이 북항하여 그린랜드에 이르렀다. 1001년에는 더욱 전진하여 뉴펀들랜드에 도달하여 북아메리카 일부를 탐험하였다.

 그중에서도 특히 영국을 가장 심하게 침공했다. 노르만의 일파인 Dean인들은 9세기 중엽부터 영국에 침입하여 앵글로 색슨이 827년에 창립한 왕국을 괴롭혔다. 그 후 알프레드 대왕 때에는 영국의 일부를 할애받았고 865년에는 대규모의 군대가 잉글랜드를 침입하여 2세기에 걸쳐 대부분의 지역을 지배하게 된다. 1004년에는 국토의 태반을 지배하며 덴마크의 왕자가 영국왕을 겸하게 되었다. 덴마크의 노르만에게 Dean이라는 이름을 지어준 이도 영국민이었다.

 바이킹족은 처음에는 어업과 수렵에 종사해 왔다. 인구증가에 의해 토지가 부족해지자 한랭하고 메마른 땅에서 온난하고 비옥한 땅을 얻기 위해 해외 진출을 시도하게 된 것이었다. 당시의 노르만족은 씨족제 사회가 해체되고 계급사회로 이행하여 국가형성기에 이르는 과도기로서 부족간의 항쟁으로 뜻을 이루지 못한 족장들이 부족민을 인솔하여 해외로 신천지를 찾아 떠나는 경우가 많았다. 일찍부터 뛰어난 항해술을 가진 그들에게 전쟁과 모험, 전리품의 갈망 등은 해외진출을 더욱 촉진하는 계기가 되었다.

 10세기 말이 되면서 바이킹의 약탈은 점차 줄어들게 되었는데 이는 덴마크, 스웨덴, 노르웨이가 왕국이 되면서 왕들이 국가 운영에 전념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기독교의 확산으로 바이킹 전사들의 가치관은 약화되었으며 노르웨이 또한 자신들이 침입한 문화에 흡수되었다. 잉글랜드 거주민과 정복자들은 영국인이 되었으며 노르만인은 프랑스인, 러스인은 러시아인이 되었다.

 바이킹은 훌륭한 항해사였다. 그들은 나무로 만든 커다란 배를 조정하여 파도를 넘고 암초와 빙산을 피해 폭풍우를 헤치면서 거친 바다를 항해했다. 먼 바다에서는 태양과 별에 의지해 항해를 할 만큼 영리했다. 또한 새, 물고기, 바람 그리고 파도의 형태에 대한 풍부한 지식도 그들이 항로를 찾는데 도움을 주었다.

바다의 후예, 바이킹(Viking)

 바이킹선은 거의 완전한 형태로 발굴되어 그 선형과 구조가 가장 상세하고 올바르게 알려진 고선이다. 배 밑에 상판을 깔고 갑판이 없는 아주 간단한 형태이며 날씨가 나쁠 때는 천막을 쳐서 임시로 선실로 사용하였다. 원래 바이킹선은 돛이 없고 노를 저어 항해했으나 먼 바다로 진출하면서 돛을 달고 항해하기 시작했다. 뱃머리와 꼬리부분은 같은 모양으로 치솟고 그 끝에는 용머리 등을 장식하여 위용을 갖추었으며 뱃전에는 목재나 가죽의 원형 방패를 나란히 세워 파도와 적의 활 등을 막았다. 또한 방패에는 현란한 색을 칠하여 모양을 내었다.

 바이킹선 중에서 전장 50m, 용골길이 45m, 노수 34쌍(68개)에 이르는 것이 있으며 일반적인 경우 전장 25~30m, 노수 20~25쌍, 승무원 80~120명 정도이다. 노의 배치에 있어서 끝까지 1단에 머물렀으며 외판의 고착은 전형적인 클링커식(위판과 아랫판을 겹쳐서 붙이는 방식) 이음 구조이다. 부유한 사람들이 배에다 시신을 매장하는 풍습 덕분에 오늘날에도 바이킹선을 구경할 수 있다. 가장 잘 보존된 것이 노르웨이에서 발굴된 오세베르그 선과 고크스타드 선이다. 이들은 둘 다 모양이 길쭉하고 우아한 배로 가볍지만 놀라울 정도로 강하다.

 바이킹족에는 그 추장이나 귀인의 장례를 치르는 방법이 세가지가 있다. 첫째는 시체를 화장하여 배 모양의 돌무덤에 매장하는 것이고, 둘째는 유해를 배에 실어 불태워 바다에 떠나보내는 것이며, 셋째는 배를 육지로 끌어올려 유해와 함께 땅속에 매장하는 것이다. 이 중에서 세 번째 방법으로 만들어진 무덤이 흔히 말하는 "바이킹의 배 무덤"이다. 이러한 배 무덤은 노르웨이 해안 지방에 집중되어 있으며 약 500여기는 될 것으로 추정된다. 19세기 후반부터 발굴되기 시작한 바이킹선은 화려한 부장품과 더불어 오슬로 박물관, 바이킹 박물관 등에 전시되어 있다.

 바이킹의 전사들에게 전쟁에서의 명예와 영광이야말로 영원한 가치를 지닌 유일한 것이었다. 전사들은 군주나 왕을 따라 전투에 참가하였으며 항상 침략과 원정에 나갈 준비되어 있었다. 바이킹 시대의 후반기에 왕은 군함, 병사, 보급품, 무기로 구성된 군대를 조직할 정도의 힘을 가지게 되었다. 왕국은 작은 구역들로 나누어지고 각 구역마다 그에 딸린 전사가 있었는데 원정을 갈 때에는 인접 구역에서 전사들과 배를 기부하기도 하였다.

 창이나 도끼, 방패, 칼과 같은 무기는 바이킹 전사들에게 가장 소중한 재산이었다. 그들은 칼에 칼의 강도나 손잡이의 호화로운 장식을 찬양하는 이름을 붙였다. 아름답게 장식된 칼은 소유자의 권력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그들의 투구는 대부분 가죽으로 만들어졌다. 전사들은 죽으면 그의 무기들과 함께 매장되었다.

 바이킹 사회에는 세 개의 계급이 있었다. 노예, 자유인, 그리고 귀족이었다. 힘든 노동은 대부분 '스랄'이라고 하는 노예계급에서 이루어졌다. 노예는 대부분 전쟁 포로이며 간혹 자유의 몸이 되기도 했다. 자유인에는 농민, 상인, 공예인, 전사, 대지주 등이 있었다. 바이킹 시대 초기에는 많은 지방의 귀족들이 작은 지역을 통치하고 있었다. 그들은 지방 민회의 규칙을 따르는데 민회에서는 자유인들이 의견을 말하고 건의할 수 있었다. 1050년경, 왕이 나라를 통치하게 되자 민회의 역할은 점차 축소되었다.

바다의 후예, 바이킹(Viking)

 바이킹은 먼 곳까지 돌아다니며 상품을 매매했던 뛰어난 장사꾼이었다. 그들에게는 배를 만들 목재, 무기를 만들 철, 모피, 고래나 물범의 가족, 조각용 고래뼈와 바다코끼리의 상아 등이 풍부했다. 그들은 이런 물건을 먼 나라까지 운반하여 그 지방의 물품들과 교역을 하였다. 영국에서는 밀, 은, 옷감을, 지중해에서는 포도주, 소금, 도자기, 금을 가지고 돌아왔다. 그들은 발트해를 건너 러시아의 강 상류까지 항해하여 낙타를 갈아타고 콘스탄티노플(지금의 이스탄불)과 예루살렘까지 진출했다. 그들이 가는 길은 무역 중심지로 성장하게 되었다.

 바이킹은 많은 신들을 믿었다. 신들은 모두 인간처럼 각기 다른 개성을 가지고 있었다. 주요한 신으로는 오딘, 토르, 프레이가 있다. 오딘은 지혜와 전쟁의 신으로 초능력을 발휘한다. 토르는 보다 현실적으로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으나 그다지 영리하지는 않다. 프레이는 풍요의 신으로 늘 관대하다. 바이킹 시대 초기의 사람들은 숲이나 산 속, 호수나 폭포 옆 등 옥외에서 신을 숭배하였다. 그러나 왕들이 자신들의 권력강화를 위해 크리스트교로 개종하면서 그들의 전통신앙은 점차 사라지게 되었다. 주변국들이 크리스트교 국가였고 무역으로 인해 사회가 자유로웠던 점도 신앙의 변화에 영향을 주었다.

 바이킹의 여자들은 독립적이었다. 남자들이 전투에 참가하면 여자들이 가정을 돌보고 농장을 경영했다(바이킹의 대부분은 농사를 지었다). 여자들은 자신의 남편을 선택할 수 있었고 남편이 구타를 하거나 성실하지 않을 경우 이혼을 제기할 수 있었다. 모든 여자들은 양모나 아마실을 잣는데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이 실을 이용하여 가족들의 옷을 짰다. 남자의 겉옷이나 여자 드레스의 가장자리에는 밝은 색깔로 기하학 무늬를 넣었으며 특히 부자들은 금실과 은실을 사용했다.

 바이킹은 빛나는 장식들을 좋아했으며, 금속 세공자들은 보석류의 장식을 정교하게 만드는데 능숙하였다. 남녀 모두 브로치, 목걸이, 반지, 팔찌를 찼다. 금과 은의 장신구는 부와 명예의 상징이었다. 침략이 성공하면 왕은 용감한 전사에게 훌륭한 장신구를 주어 포상하였다. 가난한 사람들은 동물의 뼈를 조각해서 소박한 핀이나 죔쇠를 만들었다. 색유리, 흑옥, 호박은 모두 펜던트, 구슬, 반지로 가공되었다. 바이킹은 또한 다른 나라의 유행을 받아들여 독자적인 양식을 만들어냈다.

 바이킹은 기념비를 세워 전투에서의 용맹과 죽은 친척들의 명예를 기념했다. 기념비에는 그림과 그들의 룬 문자를 새기고 종종 뱀 모양의 테두리를 둘렀다. 자신의 과업을 과시하기 위해 세운 석비와 여행하다 죽은 사랑하는 사람을 기리는 석비도 있었다. 이러한 석비는 공공의 장소에 세워져서 많은 사람들이 그들을 찬양할 수 있게 하였다. 가장 거대한 기념비는 옐링의 기념비이다. 덴마크 유틀란트 반도의 옐링에 있는 왕가의 묘지에 하랄 왕이 세웠다. 그는 자신의 부모님을 기리기 위해 이 비를 세웠는데 자신의 힘을 과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바이킹에게 연회는 긴장과 피로를 푸는 시간이었다. 배부르게 먹고, 놀이를 즐기고, 이야기를 하며 음악을 즐겼다. 왕을 위해 시를 짓는 시인들이 있었는데 이들을 '스칼드'라고 불렀다. 그들은 왕을 칭송하는 시를 지었고 이 시는 여러 세대를 거쳐 전해졌다. 어릿광대와 요술쟁이들은 속임수와 춤으로 손님들을 즐겁게 만들었다. 그들은 겨울에는 스키, 썰매, 스케이트를 즐겼다. 여름에는 낚시와 수영을 하거나 배를 탔다. 마차를 타고 여행을 하기도 했다.

 무자비한 침입과 싸움, 약탈 등으로 해적민족이라는 인식이 박혀 있던 바이킹. 그러나 해적행위는 민족이동 뿐만 아니라 전투, 정복, 탐험, 식민, 교역 등 다양한 활동을 초래하였다. 넓은 활동 범위를 가진 무역상이었고 세계 최초의 의회를 만들었으며 북아메리카를 처음으로 발견한 탐험가였다. 또한 우수한 항해사였으며 뛰어난 선박기술자, 공예가였다. 근래에 바이킹의 유적, 유물에 대한 조사와 종합적 연구에 의해 바이킹에 대한 재해석이 이루어졌다. 현재 파괴적인 바이킹관은 상당히 수정되어 중세 유럽사에 커다란 영향을 준 장대한 운동으로 보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