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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불가사의

잊혀진 왕국, 가야

잊혀진 왕국, 가락국(가야)

  서기 42년, 1세기 중엽. 그 때 한반도에는 고구려, 백제, 신라가 부족사회를 거쳐 고대국가를 형성하던 시기이다. 그 해 음력으로 3월, 안개가 몹시 자욱한 날이었다. 그 날은 낙동강 하구의 김해지역 사람들이 목욕을 하고 있었는데 구지봉 쪽에서 사람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 왔다. 아도간, 피도간 등 9간들과 함께 2,3백명의 무리가 소리가 나는 구릉 쪽으로 몰려들었다. 가까이서 들으니 분명 사람의 목소리가 허공에서 울려오고 있었다. 허공의 목소리가 말하기를 하늘이 자신에게 그곳에 나라를 새로 일으키라 했음에 자신의 명령을 따르라고 하였다.

 이어 하늘에서 보라빛 밧줄 끝에 매단 빨간 보자기가 무리들 머리 위로 내려왔다. 무리가 이 보자기를 풀자 금제 상자가 나타나고 그 뚜껑을 열자 여섯 개의 태양같이 둥근 알이 나왔다. 그 날 9간 가운데 아도간이 이 금상자를 받들고 자기 집에 가서 긴 의자에 올려 놓았다. 자정이 되어서야 흥분한 무리들은 흩어졌다. 그들은 하늘이 여섯 알을 내려보낸 뜻을 알 수 없었지만 예사로운 일은 아니라 여겨 함부로 접근하지 않았다.

가야 김수로왕

 그로부터 열 이틀이 지난 어느 날 아침, 무리들은 아도간의 금상자를 조심스레 열었다. 그러자 여섯 개의 알은 여섯 동자로 변해 있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용모가 준수하고 품위가 있어 무리들은 그들에게 엎드려 절하고 공경하였다. 동자들이 금빛 알에서 태어났다고 해서 성을 김(金)이라 했고 가장 먼저 태어난 동자를 수로(首露)라고 불렀다. 다시 10여일이 지나고 동자들은 몰라보게 자랐다. 키가 아홉 자를 넘고 생김새가 보통사람들과는 달랐다. 9간들은 하늘이 보낸 이 사람들을 그들의 임금으로 추대하기로 하고 그 달 보름에 김수로를 왕으로 모셨다. 나라이름은 대가락(大駕洛) 혹은 가야국(伽倻國)이라고 불렀다. 이것은 여섯 가야 가운데 하나로 나머지 다섯 사람들도 각각 다섯 가야의 왕이 되었다. 다섯 가야는 아라가야, 고령가야, 대가야, 성산가야, 소가야였다. 김수로왕의 금관가야를 중심으로 서로 연맹하여 고대국가 형태를 갖추게 된 것이다.

  이것이 삼국유사의 가락국기에 나오는 가야의 개국설화이다. 옛날부터 낙동강 유역에는 많은 사람들이 무리를 지어 살고 있었다. 그들은 이 곳에서 농사도 짓고 고기도 잡으면서 생활하고 있었으며 나름대로의 규범과 질서를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그들은 생활을 지도하고 이끄는 원로들을 모시고 있었는데 그들이 곧 아홉 추장들이다. 아홉 우두머리는 아도간(我刀干), 여도간(汝刀干), 피도간(彼刀干), 오도간(五刀干), 유수간(留水干), 유천간(留天干), 신천간(神天干), 오천간(五天干), 신귀간(神鬼干)이다. 이들은 어떤 문제가 발생하면 서로 모여서 상의하고 결정해서 공동체를 이끌어 갔다. 그러나 그들에게도 권력 암투는 존재했을 것이고 백제나 신라 등 인근 고대왕국의 빈번한 침탈과 회유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아홉 우두머리들은 그들이 이끄는 무리를 강력하게 결속할 필요를 느꼈고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의 왕이 있어야만 된다고 절감했을 것이다. 이 때, 그들 무리와 조금 떨어져 살고 있는 비범한 인물인 수로라는 사내에 대해 이야기를 듣게 되고 그를 왕으로 추대하게 된 것이다.

 가락국의 경제력은 농업과 수산업, 그리고 제철업이 주종이었다. 가락국의 젖줄인 낙동강이나 섬진강 유역은 기온이 따뜻하고 여름에 비가 많이 와서 벼농사에 알맞고 또 곧바로 바다를 끼고 있어 수산업에서도 유리한 조건을 가지고 있다. 기록에 의하면 가락국은 5곡을 심고 누에치기와 비단을 짤 줄 알며 소와 말을 이용하여 물건을 운반하고 농사도 지었다고 한다. 그리고 대마 재배가 성행하였다고 한다. 태평양 연안에 접하여 있어 대륙붕이 범람하고 항만과 도서가 수산업 발전의 전초기지 역할을 충분히 해내 많은 수산물을 확보하고 외국에 수출도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또 가락국의 제철 산업은 대단히 발달되어 철기를 외국에 수출할 정도였다. 철 산지로는 금관가야의 김해철산, 대가야의 야로철산과 황산철산, 척지산 철산, 창원철산 등이 있었다고 한다.

 삼국유사의 가락국기에는 김수로왕의 부인인 허황옥(許黃玉)에 대해서도 다루고 있다. 서기 48년 음력 7월 27일, 하례의 자리에서 9간들은 왕에게 자신들의 딸 중에서 가장 좋은 사람을 뽑아 왕비를 삼으라고 간청하였다. 이에 김수로왕은 자신은 하늘에서 온 사람으로 이 곳에 온 것도 하늘의 뜻이었으며 왕후를 삼는 것도 하늘의 명령이 있을 것이라 하였다. 그리고 유천간에게 명하여 가벼운 배와 날쌘 준마를 가지고 망산도에 가서 기다리게 하고 거듭 신귀간에게 명하여 승점으로 가게 하였다. 갑자기 바다 서남쪽 모퉁이에서 붉은 돛을 단 배가 붉은 깃발을 나부끼며 북쪽을 향하여 오므로 유천간이 섬 위에서 먼저 횃불을 드니 차례로 육지로 내려와 달려 왔다. 신귀간 등이 이를 보고서 궁궐로 달려와 아뢰니 김수로왕은 이 말을 듣고 매우 기뻐하였다. 그리고는 9간들에게 좋은 키를 달고 아름다운 돛대를 드날리며 가서 맞이하여 궁궐로 모셔오게 하였다.

 이 말을 전해들은 허황옥은 어찌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을 경솔하게 따라가겠느냐며 반문하였다. 유천간 등이 돌아와서 김수로왕에게 허황옥의 말을 전하자 김수로는 친히 행차를 하여 궁궐 아래 서남쪽 60보쯤 되는 곳에 천막을 치고 기다렸다. 이에 허황옥이 산 밖의 별진포 머리에 배를 매고 육지로 올라와 높은 언덕에서 쉬며 입고 있던 비단바지를 벗어 예물로 삼아 산신령에게 바쳤다. 그 때 모시던 잉신 두명의 이름은 신보와 조광이고 비복까지 합하면 모두 20여명 가량되었다. 가지고 온 물건들은 다 기록할 수도 없었다고 한다.

 왕과 함께 잠자리에 들게 된 허황옥은 자신은 아유타국(阿踰陀國)의 공주로 나이는 16세이며 이 곳에 오게 된 연유를 설명하였다. 자신의 부왕과 왕후가 같은 꿈을 꾸게 되었는데 그 꿈에서 황천상제가 이르기를 가락국의 왕은 하늘이 내려 왕이 되었으나 아직 배필을 정하지 못하였으므로 자신을 보내 배필을 삼으라고 한 뒤 하늘로 올라갔다고 하였다. 이에 부모님과 작별하고 가락국을 찾아 왔다고 하였다. 이를 들은 김수로가 대답하기를 자신은 미리 공주가 먼 곳에서 올 줄 알고 있었으므로 왕비를 들이라는 신하들의 청을 따를 수가 없었다고 말하였다.

 허황옥이 타고 온 배를 돌려보내면서 뱃사공 15명에게 각기 양식으로 쌀 10석, 포 30필을 주어 본국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잉신부처와 사속에게는 빈 집 두 채를 주어 나누어 들게 하였으며 나머지에게는 빈관한 채 20여 칸에 사람 수를 정하여 구별해서 들게 하고 일용품을 넉넉하게 주었다.

가야 김해 수로왕릉

 김수로왕이 결혼할 당시만 해도 9간으로 대표되는 토착세력과 불완전한 권력구조를 가졌기 때문에 9간들 중 어느 집안의 딸과 결혼하는 것은 자칫 걸음마 단계인 고대왕국의 체제 존속에 문제가 발생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외국의 한 여인을 왕비로 받아들이기로 마음 먹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낙동강은 곧 바다와 연결되어 있어 가락국은 어찌 보면 해상왕국에 가까웠다. 또 탈해가 김수로왕과 실력대결에 패하고 돌아갈 때 김수로왕은 뒤 이은 음모를 대비하여 전함 500척으로 이를 경계했다는 기록을 볼 때 이러한 수운력으로 외국과의 많은 교류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삼국유사에서는 아유타국을 인도의 고대왕국이라고 밝히고 있다. 아유타는 인도 이름으로는 아요디아(Ayodhya)이다. 아유타국은 주위가 5천여 리, 나라의 왕도는 20여 리의 성으로 둘러 싸여 있으며 곡식과 과일이 풍성하고 풀과 꽃들이 우거져 무성하였다. 그리고 기후가 화창하고 사람들의 풍습이 착하고 온순해 학예에 부지런했다고 한다. 이 나라의 영향력이 한 때는 인도 전역뿐 아니라 동남아시아 일대까지 미쳤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 먼 곳에서 가락국까지 올 수 있었을까? 서기 1세기 무렵에 바다는 그렇게 두렵기만 한 존재는 아니었던 것 같다. 대륙의 연안을 따라 바닷길로 이용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 허황옥이 인도를 출발하던 음력 5월에는 인도와 한반도를 잇는 해로는 바람과 해류가 북으로 올라가는 기간이다. 즉 그 바람은 계절풍이고 해류는 리만해류이다. 그래서 어떤 큰 이상기류를 가진 태풍만 만나지 않는다면 배가 무사해 항해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허왕후가 인도의 아요디아에서 무작정 가락국에 와서 곧바로 왕후가 될 수 있었느냐는 의문이 생긴다. 아무런 사전교섭없이 바로 왕후가 됐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는 지적이다. 뭔가 그 전부터 이 두 나라간에 수많은 교섭이나 왕래가 있었기에 두 왕실의 합의에 의해 결혼이 성사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 한가지 주목되는 것은 김수로왕이 죽고 난 후 가락국과 아유타국과의 교류가 갑자기 끊기게 된 점이다. 김수로왕은 슬하에 모두 10남 2녀를 두었는데 장남은 가락국의 2대왕인 거등왕이 되었고, 둘째와 셋째 아들은 허황옥의 허씨 성을 따 허가(許家)를 이루게 되었고, 나머지 일곱 아들들은 허황옥의 오빠인 장유화상을 따라 승려가 되어 훗날 지리산 칠성암으로 가 성불하게 된다. 김수로왕 생존시에는 그의 절대 권력에 많은 백성들이 복종하고 인도와의 교류도 활발했을 것이지만 허왕후와 그가 죽자 그의 절대 권력의 공백을 기득권 세력인 9간이 어느 정도 대체해 왕실의 외가쪽인 인도와의 교류도 점차 희박해지고 끊어지게 된 것으로 추측된다.

 허황옥이 이 땅에 시집옴으로써 그녀가 우리 역사에 남긴 것은 무엇인가? 두 나라가 서로 왕래했다는 것은 곧 새로운 사상과 문물의 교류를 뜻한다. 이러한 교류의 흔적을 되짚어 보는 것은 허황옥의 실존 가능성을 더욱 높이는 것이다. 먼저 파사석탑(婆娑石塔)을 들 수 있다. 처음에 공주가 어버이의 명을 받들고 가락국으로 오려 하다가 수신의 노여움을 사 바다를 건너지 못하고 부왕에게 아뢰니 부왕이 '이 탑이 영물이니 이것을 싣고 가라'하여 무사히 바다를 건널 수 있었다고 한다.

가야 파사석탑

 파사석은 인도에서 나는 귀한 돌로 닭의 피를 찍어 바르면 물기가 계속 남아 있고 태우면 유황냄새가 심하게 난다고 하는데 파사석탑의 돌도 이러한 현상이 일어난다고 한다. 파사석탑은 그 형태가 독특할 뿐 아니라 탑면의 문양이나 사리공(부처의 사리를 모셔 놓은 공간)의 위치 등으로 보아 우리 탑들과는 분명 차이가 있다.  또한 이 탑이 인도의 무불상 시기에 성행한 스투파 양식과 여러모로 비슷하다고 하는 주장도 있다.

 다음으로 김해 옛 명월사 자리에서 발견된 사왕도가 있는 화강암 조각이다. 이 돌에 조각된 형상은 삼매경에 빠진 불타를 한 마리의 뱀이 감고 있는 모습으로 이것은 인도 아요디아에서 볼 수 있는 '무칠린다(Muchilinda)라고 하는 사왕과 같다. 중국인들은 뱀을 싫어하기 때문에 중국을 거쳐서 들어온 불경에는 뱀이 나타나지 않는다. 따라서 이 사왕도 조각은 불교가 중국을 통해 들어오기 이전에 인도에서 직접 전래된 것임을 알려주는 것이다(한반도에 불교가 전파된 것은 372년(고구려 소수림왕 2) 중국을 통해서라는 것이 정설이다).

 가락태조왕릉 중수비에 있는 이수는 우리나라 그 어느 비각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문양을 수놓고 있는데 태양빛 같기도 한 것이 중앙에 있고 그 주위에는 이상한 형체의 동물같은 것들이 새겨져 있다. 이것은 인도 아요디아의 태양왕조를 상징하는 붉은 바탕에 흰색의 깃발에 그려진 문양과 똑같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수로왕릉 납릉 정문에 있는 신어상인데 이 상은 인도 아요디아의 관공서와 성문 그리고 저택 등에 조각된 것과 똑같은 모양이다.

 이러한 일련의 흔적들은 황하문명권의 일부로만 인식되어 오던 우리의 역사가 실제로는 인도의 문명까지 흡수하면서 발전해 왔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참고 자료 : 한국의 불가사의(1994년, 김한곤 저, 새날, 83-1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