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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불가사의

조화의 극치, 석굴암

조화의 극치, 석굴암

 경주 토함산 기슭에 자리잡고 있는 석굴암은 세계 불교 미술품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예술품이다. 본존불상의 고요한 모습, 가늘게 뜬 눈, 온화한 눈썹, 미간에 서려있는 슬기, 금방이라도 설법할 듯 자비로운 입 등 깊고 숭고한 내면의 마음을 느끼게 한다. 751년, 신라 경덕왕 때 재상 김대성에 의해 창건된 석굴암은 해발 745m 지점에서 동해를 바라보고 있는데 석불의 정면에는 문무왕 수중왕릉이 보인다. 아침해가 솟아오르면 불상의 얼굴에 엷은 미소가 떠오르고 새하얀 불상에 햇살이 반사되면 석굴 속은 마치 반사광을 받은 듯 신비에 젖는다.

석굴암(이미지출처 : Pixabay)

 경덕왕은 신라 35대의 임금으로 선왕인 34대 효성왕의 동생이다. 경덕왕대는 삼국통일이 완성되어 국내외의 혼란이 수습되고 안정을 찾아 평화와 풍요를 구가하던 신라 말기에 해당한다. 이같은 국력과 평화를 배경으로 신라의 문화와 예술이 황금시대를 이룩할 수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왕손의 뼈가 안치된 동해를 바라보는 신라의 성지 토함산에 석굴을 지었다는 것은 왕가의 안녕과 더불어 당대인들의 호국발원의 결실이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깊이 14.8m, 높이 9.3m의 석굴 안에 본존불이 모셔져 있다. 이 석불은 1.58m의 좌대 위에 3.26m의 거대한 불상으로 굽타 양식으로 만들어 졌다. 석굴암의 제작에 사용된 화강암은 무려 3000여톤에 이른다고 한다. 놀라운 것은 지금으로부터 1300년 전에 세워진 이 석굴이 기하학적으로 완벽한 설계에 의해 만들어 졌다는 점이다. 석굴의 평면은 반지름 12척(3.3m)으로 정확한 원을 이루고 있으며, 입구의 너비나 본존 석불의 높이 역시 반지름이 12척으로 되어 있다. 옛날엔 하루의 길이를 12시간으로 보았는데 이것은 하루의 길이와 일치한다. 그리고 원은 1년 365일을 상징하는 것으로 본다. 석굴암이 뛰어난 것은 천연 동굴이 아닌 인공굴 안에 만들어 졌으며, 구형, 삼각형, 사각형, 팔각형 등의 기하학적 구성에 의해 완벽한 조화와 통일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본존불의 좌대 방향은 방위각 117도(동으로부터 남으로 27도 방향)라고 하고 본존불은 좌대를 기준으로 동에서 남으로 4도가 틀어져 있다고 한다. 즉, 현재 본존불은 방위각 121도로 되어 있다. 이것은 일제가 수리공사를 할 때 본존불을 들어올리다가 잘못해서 그 방향이 틀어진 것으로 추측된다. 그 이유는 본존불과 좌대를 만들 때 애시당초 그 방향이 틀렸을 리 없고 본존불을 들어올리다가 뒷부분에 금이 간 모습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경주의 일출 방위각을 보면 동지 때는 119도, 춘·추분 때는 약 90도, 하지 때는 약 60도로 나타나는데 석굴암의 본존불에는 사시사철 햇빛이 들어왔다는 이야기가 된다.

 석굴암 아래에는 토함산 골짜기에서 내려오는 물을 받아서 마시는 감로수대가 설치되어 있다. 이 물은 석굴암 내의 본존불상 바로 밑부분을 타고 내려오는 물줄기라고 한다. 그 물줄기는 인조 석굴을 떠받치는 암반 사이를 흘러 석굴암 내의 습도를 조절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는데 일제시대에 일본인들이 석굴암을 완전히 해체하여 보수공사를 하면서 석굴암의 외벽과 밑을 시멘트로 짓이겨 놓고 물줄기도 석굴암의 바깥쪽으로 돌려 놓았다고 한다.

석굴암, 원

 현재 경주의 석굴암은 불국사의 암자이지만 원래는 석불사(石佛寺)라는 절이었다. 석불사가 불국사의 암자로 운영되기 시작한 시기는 1600년 이후로 보이며 이는 임진왜란 이후에 경영난을 겪게 되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절의 중심 건물이 법당이라면 암자의 중심 건물은 승방이므로 실제에 있어서 석굴암이라는 이름은 승방만을 지칭하는 것이며 거기에 있는 법당의 이름은 석굴이라는 것이다. 1910년경에 일본인들이 석굴법당을 석굴암이라고 혼동하여 사용하면서 지금까지 그렇게 불려 왔다고 한다. 그래서 석굴암은 그 호칭이 석굴 또는 석굴법당으로 고쳐져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

 불국사와 석굴암은 199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이렇게 석굴암이 우수성을 인정받고 있는데는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다. 열대지방인 인도에서는 부처를 서늘하게 모시기 위해 기원전 100년경부터 바위에 굴을 파 그 속에 탑을 세우기 시작했으며 4세기경에 이 풍습이 중국에 전해 졌다. 그리고 이것이 다시 7,8세기에 우리나라에 전해졌지만 신라에는 큰 바위산이 없어 신라의 예술가들은 새로운 방법을 고안했다. 산을 파내 굴을 만들고 조각된 돌들을 조립한 후 다시 흙을 덮어 석굴사원처럼 보이도록 한 것이다. 보통의 조각상들의 재료는 석고, 석회석, 대리석 정도이다. 이 재료들은 경도가 낮고 무른 암석들이다. 그러나 석굴암은 화강암으로 만들어졌다. 화강암은 경도가 높아 섬세한 조각을 하기에는 부적합한 재료이지만 석굴암의 불상은 완벽할 정도로 섬세하고 우아하다. 화강암은 장석, 운모, 석영 등 서로 다른 재료로 되어 있어 예상치 못한 결 때문에 쪼개지기 쉽다. 마무리 단계의 조그만 실수로 인해 조각이 떨어져 나가도 새로 작업을 해야 하는 것이다. 매우 다루기 어려운 화강암으로 조심스럽고 섬세한 제작과정을 거쳐 완벽한 미를 자랑하는 석굴암은 비록 규모는 작을지라도 세계 어느 문화재에 비해 떨어지지 않는다.

 석굴암의 구조를 살펴보면 원형의 주실 가운데 여래좌상인 본존불이 안치되어 있고 전실과 굴 입구 좌우 벽에는 팔부신중, 인왕(금강역사) 및 사천왕 등의 입상이 조각되어 있다. 주실 안 본존불 둘레에는 천부입상 2구, 보살입상 2구 및 나한입상 10구(십대제자상)를 배열하고 본존불 바로 뒤에는 11면 관음보살입상을 조각하였다. 이들의 마감돌로는 거대한 자연석주를 전실 입구 좌우에 하나씩 세워 놓았다. 불상판석 위에는 긴 이마돌을 올려 놓았고 굴 안의 천장 밑에는 10개의 감실을 두어 석굴 벽면에 변화를 주었고 감실 안쪽에는 조그만 구멍이 있어 석굴 내의 습기 조절은 물론 외부 빛을 들여보내는 역할을 하였다. 그 안에는 좌상의 보살과 거사 등이 안치되어 있다. 석굴의 천장은 돔 형식의 반원 형태를 보이는데 곡면의 네모꼴 판석과 그 사이에 쐐기돌을 넣어 견고하게 짜여졌다. 그리고 이 견고한 구성의 마지막에 한 장의 크고 둥근 돌을 얹었는데 이 돌을 천개석이라 한다. 이 돌은 현재 세 조각으로 깨어진 상태이다.

 석굴의 외벽과 지붕은 현재 약 2m 두께의 시멘트로 덮여 있다. 본래 석굴의 주벽이 이중벽 구조였으며 외벽이 내벽과 마찬가지로 잘 축조되었음은 일본인들의 보고서에 기록되어 있다. 일본인들은 그것을 복원하지 않은 채 전부 시멘트로 발라 놓았다. 이러한 무책임한 보수공사는 석굴 내의 습도유지나 빛의 침투가 어려워지는 등 여러 가지 문제를 발생시켰고 석굴암의 원형을 변형시킨 결과를 낳았다.

 먼저 석굴암의 지붕모양이다. 1920년경 석굴암을 수리하기 전의 지붕 사진을 보면 지붕의 한쪽 면에 보통 기와 8장 정도가 늘어선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의 역할에 대해서는 깨진 천개석으로 빗물이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라는 설과 석굴암 전체를 빗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큰 기와집의 위쪽 부분이라는 설이 있다. 그 기와로 석굴암의 천장 빗물을 막고 석굴암 전실 뒤에는 목조 지붕 위에 기와를 덮었으며 아치 입구에는 나무 대문을 만들어 주실을 보호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럴 경우 일출 때 햇빛이 주실의 본존불에 닿을 수 있고 그 옆 공간으로 들어온 빛은 감실에서 잔광처리되어 주실 내를 더욱 환상적으로 만들게 된다.

 일제의 보수 공사 후 버려진 석굴암의 석재들 가운데서 빛이 들어 올 수 있도록 창을 낸 것으로 보이는 석재가 발견되었다. 그래서 석굴암 내에 광창(光窓)이 있었다는 학설이 제기되었는데 현재는 정설로 굳어진 상황이다. 광창은 마치 액자의 테두리 속에 들어 있는 것처럼 보이며 여기에는 5개의 수직 창살이 끼워져 있었다. 광창을 통해 빛이 들어오면 본존불이 마치 살아서 꿈틀거리는 괴기한 신력을 지닌 생불처럼 보이게 된다. 그런데 광창의 창살 때문에 생긴 그림자는 문제가 되었다. 그 그림자는 분명히 좋은 그림을 만들어 내지 못했을 것이다. 본존불에 나타나는 이 그림자를 없애기 위해서 다른 빛을 이용해 상쇄시켰을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이 주장은 석굴암 내에 또다른 빛이 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 해답은 주실과 전실을 잇는 비도의 바로 밑 부분이었다. 햇빛이 석굴 정면을 비칠 때 비도 밑 부분에 대리석같은 물질을 이용해 그 햇빛을 반사시켜 그림자를 없앴다는 것이다.

석굴암, 해체 보수

 일제의 무책임한 보수공사 이후에도 여러 차례의 보수 공사를 했지만 아직 원형을 되찾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일제시대에는 세 차례에 걸쳐 보수공사가 있었는데 1차는 1913년~1915년, 2차는 1917년, 3차는 1923년에 시행되었다. 1차는 거의 완전히 해체한 다음 복원한 공사였다. 당시 석조물 조립에 시멘트를 사용하였는데 이는 석조물을 약화시키고 석굴을 하나의 응결된 덩어리로 만들어 버리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1차 공사 기간 동안 일본인이 교체한 석재만 286개나 되며 그 과정에서 광창의 손실, 일본신사에 있는 도리이(鳥井) 아치석의 추가, 일부 불상의 반출, 본존불의 위치 변경 등의 훼손이 있었다. 1차 공사의 결점은 준공 후 2년이 못되어 누수현상으로 나타났다. 누수의 양이 점차 많아지자 1917년에 그 방지를 위한 공사가 실시되었는데 이것이 2차 공사였다. 그러나 이것 또한 응급 조치여서 그 후에도 누수는 계속되었고 결국 석굴 내부뿐만 아니라 외부도 대폭 수정을 하게 되었다. 공사 후에도 결로현상과 침수가 계속되었다. 이 3차 중수공사 때 석굴 내에 있는 구조물들에까지 손질을 해 석굴암을 더욱 변형시켰을 것으로 보인다.

 광복 후 거의 방치되어 있다가 1961년에 석굴 공사 사무소가 설치되면서 수리에 들어가게 된다. 크게 예비공사(1961. 7. 31. ~ 1963. 6. 30.)와 본공사(1963. 6. 30. ~ 1964. 7. 1.)로 나뉘어져 실시되었다. 예비공사에서 굴 내외의 실측과 원형문제, 지하수와 지표수의 영향 등에 대해 많은 학자들이 연구했으나 습기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알아내지 못한 채 본공사에 들어가게 되었다. 본공사는 먼저 일본인이 만든 콘크리트 외벽에 1미터 정도의 공간을 두어 제2의 철근 콘크리트 돔을 설치했고 그 위에 봉토를 덮고 잔디를 깔았다. 그 다음 석굴암 밑을 흐르는 지하수가 스며들지 못하도록 물줄기를 틀어 그 배수구를 만들었고 습한 공기의 유입을 막기 위해 석굴 앞에 목조 건물을 지었다. 마지막으로 환기를 위해 두 곳에 지하 통로를 만들어 이중 돔 공간에 연결시켰고 돔 측면에 석재를 붙이는 미화 작업을 하였다.

석굴암, 해체 보수

 일제시대와 광복 후 후손들의 손에 의해 석굴암은 그 원형을 상실하고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해 버렸다. 우리는 아직도 예전 석굴암의 건축 원리를 알지 못한다. 1000여 년이나 원형대로 보존될 수 있었던 옛 선조들의 석굴암 건축 비법이 신기하기만 하다.


참고 자료 : 한국의 불가사의(1994년, 김한곤 저, 새날, 173-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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