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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불가사의

운주사 와불과 천불천탑

운주사 와불과 천불천탑

 구름도 머물고 쉬어간다는 운주사(雲住寺). 운주사는 전라남도 화순군과 나주시, 그리고 장흥군이 접하는 화순군 서남쪽 외곽에 위치해 있다. 현재 이 운주사의 평지 및 야산 골짜기에는 80여구의 석불과 19기의 석탑이 산재해 있는데 그 특이한 조형미와 수적 규모 때문에 크게 주목받고 있다. 그런데 운주사하면 천개의 불상과 천개의 탑이 있는 곳으로 알려져 있는데 석탑과 석불을 합쳐 100여개 남짓밖에 안 될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아마도 11세기 초반 운주사 창건 이후 수많은 전란과 재난에 의해 사라진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80년대만 해도 이 운주사 돌탑과 돌부처 바로 앞까지 논밭이 있어서 이곳이 훼손될 수밖에 없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 인근의 노인들에 의하면 인근 마을 사람들 중에 자기 집을 고치거나 새로 지을 때 이곳 돌부처와 돌탑을 가져다 쓰지 않은 사람이 없다고 할 정도이니 옛기록이 그저 허황된 것만은 아닌 듯 싶다.

운주사 불상

 운주사의 창건시기는 신라 말기나 고려 초기인 11세기 초반이라는 등 여러 설이 있지만 이 지역을 발굴 조사한 결과 운주사 건물의 초창연대는 늦어도 11세기 초반으로 볼 수 있으며, 그 후 조선 연산군 때까지 네 차례에 걸친 중수를 하고 1600년경(정유재란 당시)에 폐사되었다. 그러다가 1800년초에 이르러 약사전이 복원되었고, 그 후는 미세하게나마 사세를 이어 온 것으로 보인다.

 운주사의 창건 주체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거의 모두가 기록에는 남아 있지 않고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오는 것들 뿐이다. 신라 말기 도선국사에 의해 비보(裨補) 사찰로 건립되었다는 주장에서부터 나말 여초의 능주지방 호족세력에 의해 개창되었다는 주장, 또 능주 지역에 이주해온 이민족 집단에 의해 건립되었다는 주장, 도망간 노비나 천민들에 의해서 지어졌다는 주장 등 다양한 견해가 제기되어 왔으나 모두가 확증할 수 없는 추측의 수준일 따름이다.

운주사 와불

 계곡의 서편 산 정상에 머리를 남쪽으로 하고 누워 있는 와불(臥佛)은 운주사 일대의 석불 중에서 가장 전형적인 형태로 특히 이 지역에 대한 설화의 중심 부분이기도 하다. 이 와불은 두 개의 석불이 붙은 형상인데 큰 석불은 좌상의 형태이고 작은 석불은 입상의 형태이다. 먼저 큰 석불좌상을 살펴보면 얼굴은 대체로 달걀형으로 길고 넓다. 귀는 눈썹 부근에서 입 아래까지 형체만 거칠게 묘사되어 있다. 눈썹과 코는 약간 도드라지게 조각되었고 한 단 낮은 반달형의 눈과 두툼한 입술 그리고 인중은 선각으로 또렷하게 표현된 편이다. 어깨는 머리 크기에 비해 좁은 편이다.

 그 옆의 석불입상은 좌상과 조각기법이 비슷하다. 얼굴은 전체적으로 길다랗고 측면까지 잘 다듬었다. 눈썹을 튀어나오게 하기 위해 눈 주위를 한 단 낮게 처리하였으며 눈은 선각의 반달형으로 코, 입, 인중의 표현과 마찬가지로 석불좌상과 유사하다. 하체부는 오른팔 아래를 사선으로, 왼팔 아래를 수직선으로 음각하였고 양다리 구분선은 주변 옷주름보다 깊게 새겼다.

 석불좌상의 높이는 12.73m이고 석불입상의 높이는 10.30m인데 이 두 석불은 대체로 북쪽 다리 부분이 남쪽 머리 부분보다 약 5도 높고 입상쪽이 좌상쪽보다 약 5도 높게 경사져 있다. 이 와불은 다른 곳에서 만들어 이곳에 옮긴 것이 아니라 산 정상에 있는 암반에 그대로 조각한 것이다. 문제는 고려 초기 당시에 어떻게 이 무거운 불상을 일으킬 생각을 했었느냐는 것이다. 아니면 이곳의 다른 불상들처럼 파격적인 모습을 구상하여 처음부터 하늘을 보고 누워 있는 불상을 조각했는지도 모른다.

 일반적으로 석가모니가 열반할 당시의 모습을 보여주는 측와불은 인도나 스리랑카 쪽에서 많이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형태는 운주사의 와불과 현격한 차이가 있다. 인도나 스리랑카의 측와불은 석가모니가 누워서 손으로 턱을 괴거나 받친 상태인데 운주사의 와불은 그저 정면으로 하늘을 바라보고 있다.

 또 좌상과 입상의 다리 부분에는 떼어 내려고 했던 흔적으로 보이는 틈이 있다. 암반에 불상을 조각하고 떼어 내는 공정을 마치지 못한 미완성 불상으로 일부에서는 추측하기도 하지만 처음 불상을 조각한 후 생긴 흔적인지, 아니면 후대에 사람들이 나름대로 의미를 두면서 세워 보려고 만든 흔적인지는 단정지을 수 없다.

운주사 천불천탑

 운주사 골짜기 중심부에는 석조불감 쌍배불이 위치해 있다. 그 앞에는 각기 탑이 1기씩 놓여 있어 석조불감 쌍배불은 운주사 야외불당의 주존불 구실을 하고 있는 형상이다. 이 석조불감의 평면은 네모 반듯한 모양으로 평평한 기단석 위에 판석을 이용하여 짜맞춘 단상이 있고 그 위에 갑석이 있다. 불감 안은 1장의 판석을 세워 공간을 둘로 나눴으나 상단은 터져 있고 양쪽에 화염문이 조각되어 광배 역할을 하고 있다. 전면은 좌우의 벽체로 막혀 있는데 문설주 부분에 여닫이 시설로 보이는 구멍이 있다. 이 불감 안에는 2구의 석불좌상이 등을 맞대고 앉아 있는데 남향한 불상은 넙적한 얼굴에 비해 이목구비의 표현이 작고 치졸한 편이다. 또 북향한 불상은 둥그스레한 얼굴, 가느다란 눈썹, 얇게 뜬 눈, 희미한 입 등을 가지고 있는데 코는 마모되었는지 훼손되었는지 근래에 시멘트로 만들어 붙여 놓은 모습이다. 우리나라 다른 어느 곳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독특한 형태이다.

 운주사의 불상들은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모습을 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어떤 불상보다도 얼굴길이가 길고 입술이 두툼하다. 고려시대나 조선시대의 불상보다 삼국시대의 불상이 대체로 얼굴이 길다고 하는데 이 불상은 그보다도 훨씬 길다. 와불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세워진 시위불상과 북쪽 석벽을 이용해 만들어진 마애여래좌상 등은 나름대로 조각솜씨가 뛰어난 것들이다.

운주사 탑

 암벽을 지붕삼아 산재해 있는 불상군과 야산 곳곳에 널려 있는 산재석불에서 이곳이 운주사라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불상군들은 동 서 산등성이의 자연 암반에 기대어 놓여 있는데 모두 암반의 단애면을 이용하여 그 하단을 털어내고 대좌를 설치하였거나 단애면 일부를 잘 다듬어 불상을 기대어 놓았다. 이들은 좀 더 세련된 다른 불상들보다 시기적으로 약간 늦게 조성된 것으로 보여진다. 이 불상들은 몸의 비례도 맞지 않을뿐더러 표현양식도 무척 단순하다. 눈이나 코 등 얼굴의 많은 부분이 과감하게 생략되어 있어서 불상들은 근엄하거나 위엄스럽지 않고 대체로 소박하거나 정감을 준다.

 운주사에는 천개의 불상과 천개의 탑이 있었다고 전해지는데 현재 석탑은 모양을 제대로 갖춘 것이 18기 가량밖에 남아 있지 않다. 운주사 입구에 보이는 구층석탑, 칠층석탑, 특이하게 생긴 원형다층석탑(연화탑), 원형석탑(실패탑), 오층석탑(거지탑), 원구형석탑(항아리탑) 등이 있다. 이 석탑들은 몇가지 형식을 취하고 있는데 먼저 전형적인 우리나라 석탑형식으로 탑신과 옥개석이 네모 반듯한 모양을 이룬 것과 탑신이나 옥개석이 원형을 이룬 것, 벽돌로 쌓아서 만들어진 전탑 형식, 지대석 위에 기둥 형태의 거친 석재를 얹어 놓은 형식 등이 있다. 운주사의 이 탑들이 이렇게 모양이 제각각인 이유는 무엇일까? 운주사는 창건에서 폐사까지 3~4차례의 중수가 있었는데 이 시기마다 새로운 석탑들이 세워지면서 모습이 서로 달라진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운주사, 칠성석

 운주사에 또 하나의 수수께끼는 칠성석(七星石)이다. 운주사 입구에서 바라보면 운주사 서편 산 중턱에 놓여져 있는 칠성석을 볼 수 있다. 이것은 일곱 개의 자연석을 원형으로 다듬어 배치했는데 그 모양은 북두칠성의 형태와 똑같다. 그래서 운주사는 일반 불교사찰이 아니라 칠성신앙과 관련된 도교사찰이 아닌가 하는 막연한 주장이 제기되어 왔었다. 이 칠성석의 직경, 원반끼리의 중심각, 각 원반 중심간의 거리, 돌의 위치와 두께 등이 현재 북두칠성의 밝기나 위치와 똑같은 비례를 지니고 있다고 한다. 칠성석의 이러한 천문학적 가치를 인정하더라도 누가, 왜, 하필 운주사 서편 산 중턱에 만들었는지, 또 천불천탑과의 관계 등 궁극적인 의문에 대한 대답은 할 수 없는 실정이다.

 운주사에 대한 정확한 기록이 없는 것이 운주사의 천불천탑을 우리에게 더욱 신비롭고 불가사의한 존재로 인식하게 하는지도 모르겠다.


참고 자료 : 한국의 불가사의(1994년, 김한곤 저, 새날, 39-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