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산 탑사
아주 먼 옛날, 큰 죄를 지어 하늘에서 쫓겨난 한 산신 부부가 살고 있었다. 그들은 인간세상에서 두 아이를 낳아 기르며 속죄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오랜 속죄의 날이 지나고 드디어 하늘로 승천의 기회가 생겼다. 남편 산신은 그들이 승천하는 모습이 사람들 눈에 띄면 부정을 탈 것이니 깊은 밤중인 자시(11~1시)에 승천을 하자고 제의했다. 그러나 아내는 한밤중은 너무 무섭고 피곤하다며 푹 자고 나서 이른 새벽에 올라가자고 했다. 남편은 일을 그르칠까 걱정되었지만 아내의 고집을 꺾지 못했다. 이튿날 새벽에 승천하기로 결정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이튿날 새벽, 마침내 산신 부부는 승천을 시도했다. 하늘을 향해 산이 쑥쑥 솟아가고 있을 때 아랫 마을의 한 아낙네가 정한수를 뜨려고 우물을 찾았다가 그 현장을 목격하고 말았다. 아낙네는 생전 처음 보는 그 광경에 놀라 비명을 질렀다. 이 소리에 부정을 탄 산신 부부는 결국 승천을 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 굳어져 지금의 마이산 두 봉우리가 되었다고 한다. 화가 난 남편 산신은 두 아이를 뺏어 버렸다는 얘기도 있다. 그래서인지 동쪽에 있는 수마이봉(해발 678m)은 두 아이를 거느린 듯한 형상을 취하고 있고 서쪽의 암마이봉(해발 685m)은 수마이봉을 등지고 앉아 한없이 고개를 떨군 채 후회하는 듯한 형상을 취하고 있다.
조선의 3대 임금인 태종이 이 곳을 지나다가 쌍으로 쭈뼛한 모양이 말의 귀와 닮았다고 하여 마이산(馬耳山)이라 이름붙였다고 한다. 신라시대에는 서다산(西多山), 고려시대에는 용출산(龍出山)이라고 불렀다. 조선의 태조는 속금산이라 불렀다고도 한다.
마이산을 이루는 바위는 모래와 자갈이 섞여 굳은 사질역암이다. 그런데 이 사질역암이 어떻게 바다가 아닌 육지에 형성되었는가? 마이산 정상 부근에는 7천만년 전에 살았다고 하는 민물고기와 조개류의 화석이 발견되고 있다. 지금의 마이산 자리가 먼 옛날에는 호수나 강이었다고 한다. 그것이 백악기에 이르러 지층이 솟아 올라 지금의 고지대가 되었다고 추정한다. 상대적으로 높았던 화강암질 편마암이 침식이 약하여 350m내외의 진안 고원이 되었고 상대적으로 낮았던 마이산 역암이 침식에 강하여 더 높게 남아 있다.
암마이봉의 남쪽면에는 커다란 구멍들이 패여 있다. 내외부 열차로 생기는 이러한 풍화 현상을 타포니(taffoni)라고 부른다. 마이산에서만 볼 수 있는 특이한 지질학적 현상으로 동, 서, 북쪽에는 없고 오직 남쪽 면에서만 볼 수 있다. 아마도 태양열로 인해 생긴 현상이 아닌가 추측된다.
마이산 탑사(馬耳山 塔寺)에는 가공하지 않는 천연석으로 쌓여진 탑들이 모여 장관을 이루고 있다. 높이 15m, 둘레 20m의 거대한 탑들도 즐비하다. 접착제를 쓴 것도 아니고 시멘트를 사용한 것도 아니다. 그런데 100여년동안 태풍과 회오리 바람에도 끄떡없이 버티고 서 있다. 탑들이 위치한 곳은 암마이봉과 수마이봉 사이의 계곡인데 이곳은 유난히 세찬 바람이 부는 곳이다. 지형적으로 앞쪽이 넓고 뒤쪽이 좁은 계곡이어서 바람이 세차게 휘몰아쳐 오는 것이다. 특히 여름철 태풍이 불어오면 언덕의 나뭇가지가 부러지고 웬만한 나무는 뿌리채 뽑히지만 이 곳의 돌탑은 조금씩 흔들리기만 할 뿐 쓰러지지 않는다. 이는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에서도 보기 드문 불가사의로 손꼽힌다.
이 탑들은 1885년에 입산하여 솔잎 등으로 생식하며 수도한 이갑룡(본명 : 경의(敬議), 자 : 갑룡(甲龍), 호: 석정(石亭), 1860~1957) 처사(處士)가 30여년동안 쌓아 올린 것이다. 1860년에 전주 이씨 효령대군 16대손으로 태어난 그는 16살에 부모님의 여의고 19세 때 유랑 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던 중 25세 때 마이산에서 유,불,선에 바탕을 두고 용화세계의 실현을 위해 수도에 들어갔다. 마이산은 양의 산인 지리산이 200리, 음의 산이라는 계룡산이 200리이며 그 한복판의 마이산은 남녀 두 봉우리가 마주보는 절묘한 곳이었다. 그 정기로 사바세계를 개척하리라 마음먹고 중생 구제를 위해 고행을 자처하며 하나 둘 탑을 쌓기 시작했다.
마이산 탑사에는 당시에 120여기의 탑들이 세워져 있었지만 현재에는 80기만이 남아 있다. '막돌 허튼식'이라는 조형 양식으로 음양의 이치와 팔진도법이 적용된 이 탑들은 정성과 탁월한 솜씨로 쌓아졌다. 이갑룡 처사는 낮에는 탑을 쌓기 위해 인근 30리 안팎에서 돌을 날랐고 한밤중 하루에 한 개씩 돌을 올렸다고 한다. 전국 팔도의 명산에서 축지법으로 돌을 가져와 천지탑 등 주요 탑에 한두 개씩 넣어 탑들은 신묘한 정기를 가지고 있다. 위치와 모양이 제각기 음양오행의 이치에 따라 소우주를 형성하고, 우주의 순행원리를 담고 있다.
탑을 쌓는 방식은 2가지가 있는데 피라미드 형식과 일자형 탑인데 피라미드 형식의 탑은 팔진도법(제갈공명이 창안한 진법으로 가운데에 중군을 두고 전후좌우 그리고 사우(四隅)에 여덟 진을 배치하는 것)에 의해 타원형으로 돌아 올라가며 밖으로 돌을 쌓고 안으로 자갈을 채워 그 속에 비문을 넣어 쌓은 것이다. 또한 탑의 상단 부분은 기공법(氣功琺)을 이용하여 쌓았다고 하는데, 맨 꼭대기 마지막 돌을 올리는데는 100일의 기도 후 올렸고 피라미드 상단부분에는 잔돌로 자리를 만들고 그 곳에 우물 정(井)자로 나무를 고정시킨 후 그 위에 올라서 돌을 올렸다고 한다.
탑사 내에는 천지탑, 오방탑, 약사탑, 월광탑, 일광탑, 중앙탑과 이 탑들을 보호하는 주변의 신장탑이 있다. 천지탑은 만 3년이 걸려 세웠다고 전하는데 좌우의 음양이 조화가 되어 아무리 비바람이 몰아쳐도 넘어지지 않는다고 한다. 그 앞에는 오행을 상징하는 오방탑이 있는데 천지탑을 지지하는 역할을 한다. 천지탑 주변에는 32기의 장수의 탑이 있다. 천지탑을 보호하고 마군의 침입을 막는 의미라고 한다. 천지탑 아래에 갑룡이 거처하는 곳이 있으며 대웅전 아래에 중앙탑이 있는데 바람에 흔들거려도 넘어지지 않고 잘 버틴다하여 흔들탑이라고도 불린다. 갑룡의 좌상 앞에는 약사탑이 있는데 인간의 병을 쾌유하기 위한 것이라 한다. 또, 좌상 옆에는 일광탑이 있고 암바위 옆에는 월광탑이 있는데 이 두 탑은 사바세계의 세월을 나타내듯 인간의 세월을 보여준다고 한다. 마이산의 이 탑들은 우주의 축소판이자 인간의 삶의 현장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갑룡 처사는 나이 60이 넘자 틈틈이 글을 써서 30여권의 책을 남겼으나 대부분 분실되고 현재 마이산 탑사에 2권만 보관되어 있다. 그가 탑을 축조하던 중 수도를 하면서 영의 계시를 받고 썼다는 이 책은 처음 보는 알 수 없는 글자로 쓰여졌는데 지금까지 아무도 그 뜻을 풀이하지 못하고 있다. 그는 어려운 환경 속에서 혼자서 글을 배워 글문이 짧다고 하는데 어떻게 해서 이런 많은 서적을 남길 수 있었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는 죽기 전에 앞으로 영에 통달한 사람이 나와 해독할 수 있으며 그 글을 해독하게 되면 제세의 비법을 알게 될 것이므로 소중히 간직하라는 유언을 했다고 한다. 일부 국내 학자들이 그 내용을 판독하려고 복사를 해갔지만 아직 그 내용을 밝혀내지 못했다고 한다.
마이산 탑사에서만 볼 수 있는 또 하나의 신비는 바로 역고드름이다. 겨울에 정한수를 떠 놓고 기도를 드리면 그릇에서 고드름이 거꾸로 뻗쳐 오른다. 기도의 정성이 깊으면 그릇 속에는 이처사가 쓴 신서가 박힌다. 이 역고드름 현상은 요즘도 매년 한겨울에 몇 차례씩 일어나고 있다. 이는 자연적인 현상으로 탑사 오른쪽에서 천지탑을 지나 암마이봉 절벽으로 돌아 올라가는 바람에 의해 역고드름이 생긴다고 하는 것이 일반적인 주장이다. 그러나 탑의 단 위에서만 고드름이 생기고 그 바로 아래의 바닥에서는 고드름이 생기지 않는 현상은 설명이 불가능하다.
마이산 도립 공원 내에 위치한 이 탑사는 탑을 비롯한 대웅전, 산신각, 미륵불, 영신각, 종각 요사채 등이 복원되면서 명실상부한 전통 사찰로 자리잡았고 훌륭한 관광 명소가 되었다. 탑사의 축조와 이갑룡 처사에 대한 믿기 힘든 여러 전설이 내려오는데 일부 과장된 부분이 있다 치더라도 수많은 마을 주민들이 목격한 분명한 진실인 것이다. 풀리지 않을 수수께끼를 간직한 탑사에는 오늘도 많은 사람들이 찾아들고 있다.
참고 자료 : 한국의 불가사의(1994년, 김한곤 저, 새날, 11-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