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만대장경의 신비
해인사 팔만대장경판은 지금으로부터 750여년전인 고려 고종 때 1236년에서 1251년까지 16년간에 걸쳐 제작된 목판이다. 몽고의 병란을 맞아 국가 위기를 대처하기 위하여 전국민이 단결하여 부처님의 힘으로 적을 물리치겠다는 의지로 만들어낸 우리의 위대한 유산이다. 총 81,258판 1,511부 6,802권으로 상하 두 채의 목조 건물인 수다라장과 법보전의 판가에 칸 당 2층씩 5층으로 경판을 세워서 이중으로 포개어 놓았다. 연대가 확실치 않은 잡판이라 부르는 경판과 함께 고려 각판 2,835장이 보관되어 있다.
마구리(인쇄시 편의를 위한 부분)를 포함한 총 길이는 68cm나 78cm짜리가 대부분이며 폭은 약 24cm, 두께 2.7~3.3cm이고 평균 약 2.8cm, 무게는 3~3.5kg정도이다. 경판에 새겨진 글자수가 23행 14자이므로 한면에는 322자가 있고 양면에는 644자가 새겨져 있는 셈이다. 전체로는 5200만자 정도가 된다. 판의 후면 끝에는 경의 이름과 장 수, 천자문 차례의 함호를 새기고 좌우 끝에 각목에도 동일한 표시를 남겼다. 글자는 구양순체로서 한 사람이 쓴 것처럼 동일한 필치로 오자나 탈자가 거의 없다.
16년의 제작 기간 중에 판각기간은 약 12년 정도이다. 연도에 따라 판각량은 달랐지만 이 12년 동안에 81,340여판, 글자는 5200만 자 가량을 어떻게 판각하였는지 의문이다. 아주 숙달된 각수로 하여금 옛날 방식으로 대장경판을 판각시켜 보았더니 하루에 20여자를 넘지 못했다고 한다. 이러한 사실을 바탕으로 당시 판각에 참여한 각수를 추정해 보면 약 593명이 된다. 그러니까 593명의 각수가 하루도 거르지 않고 12년동안 판각만 했다는 이야기다. 593명의 아주 능숙한 각수가 존재했었는지에 대해선 상상이 가지 않는다. 그리고 매년 고르게 판각한 것이 아니어서 어떤 해에는 약 1,500명 이상의 각수가 참여했었다는 결론이 나오기도 한다.
판각에 사용된 목재는 예로부터 대추나무와 배나무가 가장 좋으며 가래나무를 그 다음으로 친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과수목인 대추나무와 배나무보다는 산야의 자생 교목인 가래나무를 흔히 사용하였다. 그리고 목활자를 만드는 데는 박달나무, 돌배나무, 산벗나무, 자작나무 등이 사용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대장경이 보관된 장경판전 입구에는 목판의 재료로 쓰인 자작나무의 모형이 전시되어 있다.
판각과정은 나무를 필요한 것만 가려내어 적당한 크기와 두께로 나무판을 켜서 바다의 짠물에 3년정도 담궈 두어 결을 삭힌다. 소금물을 먹은 나무는 같은 종류의 다른 나무들보다 훨씬 무겁다. 이런 결 삭힘의 과정을 통하여 부식예방과 방제효과를 얻을 수 있다. 목재의 결 삭힘이 이뤄지면 나무판의 양쪽 표면을 대패질하여 반듯하고 부드럽게 한 다음 양쪽 끝에 각목을 마구리에 붙여 뒤틀리지 않게 한다. 이것은 양각된 글씨를 보호함은 물론 통풍이 잘 되게 하여 습기에 의한 부식을 방지한다. 이렇게 마련된 판각용 장판에 판서본(종이에 새길 내용을 깨끗하게 적은 것)을 뒤집어 붙이고 글자를 새긴 후 최종적으로 옻칠을 해 방부 및 방제 효과를 내게 된다.
그렇다면 대장경이란 무엇인가? 대장경이란 불교 교리를 종합 편찬한 일종의 성서로써 일체경, 삼장경 또는 장경 등으로 부르기도 하며 경장, 율장, 논장의 삼장으로 구성된다. 경장은 부처님께서 제자와 중생을 상대로 설파하신 내용을 기록한 것이고, 율장은 제자들이 지켜야 할 논리와 조항 및 공동생활에 필요한 규범을 적은 것이며, 논장은 경장과 율장에 관해 스님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게 해설을 달아 놓은 것이다.
여기서 몽고의 침입으로 피폐하던 시절에 엄청난 돈과 시간을 소모하여 대장경을 만들 필요성이 있었을까하는 의문이 생긴다. 고려 때는 국민 모두가 부처님의 말씀에 의지하며 살아가던 때였다. 1231년, 고종 18년에 몽고군이 침입해 왔고 조정은 화해를 청하여 간신히 평화 조약을 맺었다. 1232년에 몽고군은 다시 침입을 강행해 왔다. 고려 조정은 변변한 대응도 하지 못하고 전국토가 몽고군에게 짓밟히고 말았다. 온 국민의 염원과 피땀이 서린 초조대장경과 의천의 속대장경 경판은 부인사에 보관되어 있었다. 그러나 몽고인들은 고려 국민의 정신적 지주인 대장경의 의미를 알리가 없었다. 몽고군에 의해 하룻밤 사이에 대장경은 잿더미가 되어 버렸다. 고려인들의 분노와 허탈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예전에 현종이 초조대장경을 제작하면서 거란군이 스스로 물러간 일을 보아 정성껏 대장경을 간행하면 몽고군도 스스로 물러가리라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이에 임금은 강화도에 피신하여 있으면서 1237년에 대장경 각판을 몽고군 퇴치를 위한 간절한 소망을 담아 제작하게 되었다.
흔히 강화도에서 제작되어 그 곳의 선원사 보관되어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것이 어째서 현재의 해인사로 오게 되었는가? 거기에 대한 자료가 많지 못해서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학설이 있는데 그것들을 살펴보자. 강화도가 아닌 남해나 거제도 등에서 새겨서 해인사로 가져왔다는 주장도 있으나 조금은 신빙성이 떨어진다. 대장경판이 원래 두 벌이었다는 주장도 있다. 이 주장은 한 벌은 남해나 거제도에서 나무를 가져와 해안사에서 새겼고 또 하나는 서해안과 남해안에서 나무를 실어다가 강화도에서 새긴 것으로 보고 있다. 이것은 판각 위치나 옮겨온 경로에 대한 문헌의 기록과도 맞아 떨어지고 있다. 그러나 한 벌을 새기는데도 많은 국력이 동원되었는데 두 벌이나 만들 수 있었을까하는 의문이 있다.
아직까지 가장 큰 지지를 받는 학설은 강화도에서 해인사로 옮겨 왔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그 시기에 있어서 많은 차이를 보인다. 혹자들은 고려 말에서 조선 초사이에 옮겨 왔다고 하고 태조 3년에서 정조 원년사이의 7년간에 옮겼다고도 하며, 조선 태조 7년에서 정조 원년 사이에 옮겼다고도 한다.
대장경을 옮기는 일도 쉽지는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대장경판은 나무로 만들어져 충격과 습기에 노출되면 파괴되거나 썩어버릴 염려가 있었다. 또 글자의 끝이 가늘고 날카로워 조그만 충격에도 떨어져 나가 버릴 수 있다. 따라서 정교하게 포장을 해야 했다. 각판 부분이 서로 맞닿지 않게 해야 하며 비를 맞지 않아야 한다. 또 마구리의 손잡이를 글자를 새긴 경판보다 두껍게 하여 맞닿지 않게 한 점도 눈에 띈다. 이렇게 포장하기 위해서는 요즘 쓰는 한지의 1억장 정도가 필요했다. 장정 한 사람이 30~40kg을 옮긴다고 봤을 때 연간 약 14,000여명이 필요했을 것이다.
대장경을 보관하고 있는 장경판전의 정확한 창건 연대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대략 조선 초기에 건립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번도 화재나 전란 등의 피해를 입지 않았으며, 세계 유일의 대장경판 보관용 건물이라고 한다. 건축기법은 조선초기의 전통적인 목조 건축 양식을 보이며 건물 자체의 아름다움은 물론 건물내 적당한 환기와 온도, 습도 조절 기능을 자연적으로 해결할 수 있어 지금까지 대장경판이 온전하게 보존될 수 있었던 큰 이유라고 한다. 장경판전은 모두 4개로 이루어져 있다. 북쪽의 건물을 법보전(法寶殿)이라 하고 남쪽의 건물을 수다라전(修多羅殿)이라고 하는데 이 두 건물을 잇는 작은 두 건물에는 사간장(寺肝藏) 대장경이 봉안되어 있다.
정남방향에는 직사광선으로 인하여 대장경이 상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3m쯤 거리를 띄어 진열대를 세워 놓았다. 또 습기를 받지 않도록 지상에서 30cm 높이에 진열대를 마련하였다. 남쪽 건물인 수다라전의 동남쪽 창은 창살이 굵고 큰 데 비하여 북쪽 건물인 법보전의 창은 작고 좁아 대칭을 이룬다. 이처럼 창문 크기를 반대로 대칭시킨 것은 공기의 대류는 물론 장경판전 내의 적정 온도를 유지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이러한 공기의 원활한 흐름은 장경판전 내의 온도를 일정한 수준으로 유지시켜 주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가장 높을 때와 낮을 때의 온도차가 15도를 넘지 않는다고 한다.
또 하나 경판을 보호해주는 것은 장경판전의 토질이라고 할 수 있다. 토질 자체도 좋거니와 숯과 소금, 횟가루, 찰흙 등을 섞어 지반을 다져 놓았기 때문에 습도를 일정하게 유지시켜 경판이 썩거나 갈라지는 것을 방지할 수 있다. 장경판전 내의 습도는 연중 내내 60% 내외를 기록하고 있어 거의 일정하다.
대장경판이 오랫동안 보존될 수 있었던 이유는 장경판전의 이유도 있었겠지만 여러 번의 위기를 잘 넘겼기 때문이다. 팔만대장경을 보관하고 있는 해인사에서 98년 6월에 발간한 "월간 해인"이란 책의 내용을 인용하려 한다. 대장경판에는 여러 번의 위기가 있었는데 그 첫 번째로 세종 5년에 일본이 대장경을 하사해 달라고 끈질기게 요구하여 넘겨 주려 하였으나 나중에 더 큰 물건을 달라고 할까봐 넘겨 주지 아니 하였다 한다. 그 후에도 일본의 요구는 계속 되었고 세종은 대장경판을 도성 근방으로 옮겨 중요한 국보임을 알려 넘겨주지 않으려 했다고 한다. 그러나 수송에 어려움이 있어 포기하였다 한다. 만약 그 때 서울 부근으로 옮겼다면 많은 전쟁 중에 남아 있지 못했을 것이다.
두 번째 위기는 임진왜란 때였다. 1592년 4월 13일 부산에 상륙한 왜군들은 27일에는 성주를 점령해 버렸다. 성주에서 해인사까지는 이틀이면 충분한 거리였다. 대장경의 하사를 요구하던 그들이었으니 약탈할 마음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곽재우를 비롯한 의병들과 스님들의 승병으로 인해 왜군을 가야산에 방어했다고 한다.
세 번째 위기는 6.25전쟁 때였다. 남침한 인민군은 3개월만에 낙동강 동편을 제외한 전 국토를 수중에 넣었다. 그 해 9월 인천 상륙작전으로 전세가 역전되면서 북쪽으로 퇴각하지 못한 인민군들이 해인사를 중심으로 게릴라전을 펼쳤다. 이에 미국 작전당국은 해인사 폭격명령을 내렸고, 명령을 받은 공군 중령은 그럴 수 없다고 끝까지 버텼다고 한다. 그리하여 결국 대통령과 미국 작전국의 마음을 돌릴 수 있었다고 한다. 또한, 해인사 스님들의 얘기에 의하면 사찰을 점거하고 있던 인민군이 철수하면서 해인사를 불지를 것인지 말 것인지 서로 언쟁이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들은 투표로 결정하기로 했고 결국 한 표 차로 남겨 두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신라 애장왕 때 창건된 해인사는 기록에 남아 있는 화재만 해도 300년사이에 7차례가 있다고 한다. 기록에 없는 기간까지 포함하면 장경판전을 지은 후에도 수십차례의 화재가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특히 불길이 번지기 쉬운 산 쪽에 위치한 장경판전이 온전할 수 있었던 것은 단순히 기적이라 하기에는 신비한 일이다. 부처님의 가호를 받았던 것은 아닐까?
대장경판은 750여년이 지난 목판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완벽하나 근래에 들면서 많은 관람객의 출입으로 경판에 먼지가 두꺼운 먼지가 쌓였다. 또 인쇄를 할 때 먹과 함께 사용한 전분질의 풀이 인쇄 후에 충분히 제거되지 않아 글자 부분에 먹의 두꺼운 층이 형성되어 있는 경판이 상당하다고 한다. 또 일부 경판은 갈라지거나 너비굽음 등의 결함이 나타나고 있어서 보다 완벽한 보존 대책이 필요한 실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