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대양 집단 자살 사건, 32명의 집단 자살 미스터리
이 사건과 관련해서 언젠가 정리를 한번 해보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얼마 전에 기사를 하나 접하게 되었습니다. 읽어보니 상세하게 잘 정리가 되어 있는 것 같아 기사를 옮겨 보았습니다. 논란이 있는 부분들은 제외하고 요약하였습니다. 기사 전체를 보고 싶으신 분은 포스팅 하단의 뉴스 링크를 확인하세요.
오대양 집단 자살사건은 1987년 8월 29일 경기도 용인군(현재 용인시 처인구) 남사면 북리의 (주)오대양의 공예품 공장에서 수십명이 한꺼번에 주검으로 발견된 사건입니다. 시신들은 손이 묶이거나 목에 끈이 감긴 상태였습니다. 사이비 종교에서 운영하던 사업장 내 식당 천장에서 오대양 대표 박순자와 그의 가족, 종업원 등 32명의 변사체가 발견되어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오대양 집단 자살사건 현장(출처 : 조선일보)
사건은 박순자라는 사람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박순자는 (주)오대양의 대표인 동시에 신흥 사이비 종교의 교주였습니다. 그녀는 신도들을 동원해 170여억 원의 사채를 끌어다 썼는데 금액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지자 채무자들이 원금과 이자에 대해 독촉하기 시작했습니다.
채권자인 이모씨는 그의 부인과 함께 사채 5억 원의 변제를 요구하러 오대양 공장을 찾았다가 직원 13명에게 집단 폭행을 당했습니다. 경찰은 폭행에 가담한 오대양 직원을 구속했고 박순자는 경찰에서 수사를 받는 도중 기절해 아들과 함께 병원에 입원했습니다. 이튿날인 1987년 8월 25일, 병원을 몰래 빠져나온 박순자는 오대양 직원과 육아원 수용아 등 130명과 함께 잠적해 버렸습니다.
채권자 300여명은 박순자에게 80억 원을 빌려줬다며 경찰에 신고했고 경찰은 오대양 사건의 수사 방향을 단순 폭행에서 거액의 사기 사건으로 전환했습니다. 이로 인해 사건이 언론에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경찰은 채권자들의 제보에 따라 오대양 용인 공장을 수색했고 이 과정에서 49명의 주검을 찾아냈습니다. 하지만 박순자의 모습은 찾을 수 없었습니다. 경찰이 공장을 다녀간 이튿날 박순자의 남편 이모씨 등은 용인 공장 수색 도중 천장에서 박순자를 포함 32명의 주검을 발견하였습니다.
경찰은 사채를 갚을 능력이 없었던 박순자가 신도들과 함께 용인 공장의 식당 천장에서 4일 동안 숨어지낸 것으로 보았습니다. 경찰은 박순자의 두 아들과 공장장이 탈진 상태에 있는 박순자와 종업원 28명의 목을 졸라 살해하고 뒤따라 자살한 것이라고 사건 발생 일주일만에 수사를 종결하였습니다.
그러나 풀어야할 의문점이 숱하게 남아 있었습니다. 식당 천장은 조금만 밟아도 꺼져내리는 석고보드로 되어 있었고 주검이 이중 삼중으로 쌓여 있었습니다. 게다가 이곳의 면적은 4평 남짓에 불과했는데 이런 곳에서 어린아이 10명을 포함한 32명의 남녀가 8월의 무더위 속에서 4일 동안이나 지냈다는 것이 설득력이 없다는 주장이 제기되었습니다.
당시 부검 의사는 3구의 시체는 자살이 분명한 것으로 추정되지만 나머지 사람들은 교살에 의한 질식사가 분명하며 누군가에 의해 계획적으로 행해진 집단 타살극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사건 발생 1년여가 지난 후, 5공 비리와 관련한 국정감사에서 오대양 사건에 대한 의혹이 집중 제기되었습니다. 특히 5공 시절 새마을운동중앙본부장이었던 전모씨가 대전의 오대양 본사를 방문한 뒤 회사가 2-3년 사이 급속히 성장했다는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이로 인해 고위층이 관련되었다는 설이 나돌면서 권력의 비호 아래 저질러졌을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고 경찰은 전담반을 꾸려 재수사에 착수했습니다.
경찰은 오대양 사건의 타살 혐의를 잡고 당시 잠적한 것으로 알려진 총무과장 노모씨를 수배하고 오대양 주변에서 각종 모금 활동을 해온 것으로 알려진 송모씨를 사기 혐의로 구속했습니다. 하지만 경찰의 재수사에도 불구하고 사건의 진상을 밝히지 못했습니다.
자수한 오대양 직원들이 경찰조사를 기다리고 있다(출처 : 한겨레)
사건 발생 4년이 넘은 1991년 7월, 당시 오대양 직원이었던 6명이 자수를 하면서 세번째 수사가 진행되었습니다. 경찰이 쫓고 있던 이 사건의 유력 용의자 3명은 이미 사망해 암매장되었다는 진술을 확보하고 대전에 있는 오대양 농장 주변에서 주검 4구를 찾아냈습니다.
경찰은 자수자들의 진술을 통해 오대양 직원들이 철저한 규율과 통제 속에서 생활해온 사실을 알아냈습니다. 이들은 규율을 어기거나 박순자의 눈 밖에 난 사람들에 대해 박순자의 지시에 따라 무자비한 집단 폭행을 가했습니다. 경찰은 주검으로 발견된 총무과장 노모씨 등 3명도 동료 직원들에게 폭행당해 살해된 것으로 추정했습니다.
경찰의 수사가 진행되는 동안 사건과 관련된 오대양 직원들의 추가 자수가 이어졌고 사건이 진상이 밝혀질 수 있을지에 대한 관심이 집중되었습니다.
대전 오대양 본사에서 실시된 현장검증(출처 : 한겨레)
재수사가 결정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오대양의 박순자 사장이 끌어들인 사채 중 일부가 (주)세모로 흘러들어갔다는 기사가 나왔습니다. (주)세모 대표이사인 유병언의 장인이 대표 목사를 맡고 있는 대한기독교복음침례회(구원파)가 오대양의 배후 세력이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민주당 박찬종 의원이 관련 자료를 공개하면서 불거져 나왔고 대검은 대전지검에 (주)세모와 기독교복음침례회를 둘러싼 의혹을 수사하도록 지시했습니다. 이 회사는 1986년에 한강유람선 선정 과정에서 특혜 시비를 빚기도 했었습니다. 결국 경찰의 수사는 ㈜세모 유병언 사장을 소환해 집단 자살과의 관련성, 5공과 유착설 등 관련 내용을 수사하기도 했습니다.
경찰의 전면 재수사는 한달 남짓 이어졌습니다. 그러나 경찰은 수사를 기피하고 있다는 의혹을 받았습니다. 범인들의 자수 동기에 배후 세력 등의 의문이 많은데도 불구하고 이들의 행적 수사를 외면하고 있었습니다. 특별수사본부를 설치한다고 발표하였으나 수사 인력은 배치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게다가 졸속수사 과정에서 당시 사망자들의 목에 걸렸던 끈 등 증거품을 분실하는 어이없는 일도 벌어졌습니다.
재수사에서도 의혹을 풀지 못한채 수사는 마무리되었고 자수한 오대양 전 직원 6명에게는 상해치사 및 사체 은닉죄 등이 적용돼 징역 4-7년이 선고되었습니다. 그렇게 사건은 일단락되었고 몇가지 의혹들은 해결하지 못한 채 여전한 미스터리로 남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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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852823.html